왕처럼 화내라
크리스토프 부르거 지음, 안성철 옮김
미래인, 328쪽, 1만2800원

분노란 말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감각되지 않는다. 어떤 이에겐 무작정 삼켜야 할 것이며, 또 다른 이에겐 덮어놓고 터뜨려야 할 어떤 것이다. 저자는 그러나 분노란 말의 아슬아슬한 경계에 주목한다. 무턱대고 참아서도 대책 없이 발끈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한다. 심리 트레이너인 그에게 분노란 열정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이 책은 들끓는 분노를 삶의 에너지로 전환시키는 방법에 대한 친절한 안내서다. 저자는 불끈 솟아나는 분노의 감정을 적절히 활용하라고 권한다. 분노를 효율적으로 변주하면 일이나 인간관계에서도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저자는 분노를 다스린다는 뜻에서 ‘분노 대왕’이란 비유적 표현을 끌어온다. 또 분노를 마구잡이로 터뜨리는 ‘폭군’, 분노를 꾹 누르고 사는 ‘물러난 왕’ 등으로 유형을 나눈다. 폭군처럼 화를 조절하지 못하면 주변과 마찰을 일으킨다. 분노를 억압하는 물러난 왕에겐 에너지가 없다. 그러나 분노 대왕처럼 분노의 에너지를 긍정적으로 제어한다면 늘 주변을 장악하고 살아갈 수 있다는 얘기다.

분노를 성공의 이음매로 활용한 유명 인사들의 실화도 담겼다. 당겨쓰면 이런 이야기다. 1958년 뮌헨에선 독일 축구의 역사를 뒤바꿀 한 소년의 분노가 폭발한다. ‘TSV 1860 뮌헨’에서 뛸 예정이었던 소년은 이 팀의 한 선수에게 따귀를 맞았다. 분노한 소년은 ‘FC 바이에른 뮌헨’으로 팀을 옮겼다. 훗날 독일의 축구 황제로 불린 프란츠 베켄바우어 이야기다. 저자는 이 일화를 분노가 결심을 부르고 열정적인 행동으로 이어진 대표 사례로 소개한다.

‘책 속의 책’을 끼워 넣은 것도 흥미롭다. 장과 절을 넘어갈 때마다 ‘분노 나라’ 이야기가 나온다. 이론적 설명과는 별도로 ‘분노 나라’의 왕이 분노의 긍정적 힘을 발견해가는 한 편의 옛날이야기가 전개된다. 분노에 대한 짧은 메시지인 ‘왕을 위한 계명’ 182가지도 곳곳에 나열돼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다.

추락하는 경제 탓에, 텅 빈 지갑 탓에, 밀려난 직장 탓에 이래저래 분노할 일 많은 시절이다. 오늘도 덜 삭은 분노가 슬금슬금 피어오르고 있다면 서둘러 이 책을 펼쳐볼 것을 권한다. 분노는 고통의 신호이자 열정의 에너지다. 이 에너지를 억압하는 대신 긍정적 힘으로 전환시킨다면 고통의 시절도 거뜬히 넘길 수 있지 않을까. 부글부글 끓는 분노는 인간이 지닌 가장 순수한 형태의 에너지인 것이다.
  
여든 일곱의 아비가 예순 다섯 아들의 손을 잡는다.
기력이 쇠한 노수(老手)는 쭈그러진 또 다른 노수를 가만히 쓰다듬는다.
여든 일곱의 눈이 촉촉해진다. 예순 다섯은 습한 눈을 애써 외면한다.
“아부지, 오도바이 소리가 영 시끄럽네예, 맞지예?”
예순 다섯이 슬그머니 마당으로 나선다. 축 늘어진 여든 일곱 노구는 별 대꾸를 못한다.
대문 밖 부릉부릉 엔진 소리 요란하다.
여든 일곱 노구를 실어나르는 전기 스쿠터가 제 존재감을 과시한다.
예순 다섯이 ‘오도바이’를 손질하고 있을 때 여든 일곱의 할배가 손주를 찾는다.
서른 둘의 손주는 할배 앞에 무릎을 꿇는다.
서른 둘의 악력에 사로잡힌 할배의 팔이 앙상하다.
“느그 아부지, 요새 마이 아프다매, 내가 큰 걱정인기라...”
여든 일곱의 아비가 예순 다섯의 아들을 염려한다.
하늘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는 노구가 시나브로 노인이 돼가는 아들의 몸을 염려한다.
“느그 아부지, 우리 아들 좋은 약 구해줄 수 있제?”
인간이 인간을 낳는 일.
할배가 아비를, 아비가 아들을 낳는 일.
할매가 애미를, 애미가 딸을 낳는 일.
할매가 아비를, 아비가 딸을 낳는 일.
할배가 애미를, 애미가 아들을 낳는 일.
그 지독하고 아름다운 운명.
노곤한 가을 햇살에 감나무가 제 몸을 축 늘어뜨린 청도에서
여든 일곱 아비가 예순 다섯 아들의 손을 매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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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공부중인 친구 녀석이 제 블로그에 “내년이면 한국 나이로 33세가 되는 아들에게 아직까지 경제적 지원을 해야만 하는 엄마 아빠에게 아들이 그 돈으로 엿 사먹은 것만은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라고 써 놓았다. 녀석의 ‘아빠’는 이런 댓글을 달았다. “33살이 아니라 50살이 되어도 너는 나의 아들이다. 다른 나라에 비해서 돈이 덜 든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부담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있다.”

아름다운 댓글 대화를 엿보다가 문득 추석 풍경이 떠올라 글로 옮겼다.



  
문득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던가 싶은 때가 있다. 너저분한 정치 언어에 휩싸여 하루를 탕진하는 요즈음이 그렇다. 내게 추악한 정치 언어는 가깝고, 매끈한 문학 언어는 아득하기만 하다. 대부분의 시간을 악취나는 정치 현장에서 허우적대는 나는, 고백컨대, 단 한줄의 문학도 속시원히 소화하지 못한다. 허기진 감성으로 문학을 뒤적여도 화사한 문학 언어는 내 가슴 어딘가에서 턱, 걸려버리곤 했다.

고향 길에 집어든 『개밥바라기별』은 그런 점에서 낯설었다. 내게 일단의 문학적 감성이라도 남아있었던 걸까. 그 전부를 소진해버린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술술 읽혔다. 황석영의 투박한 문장이 가슴을 울렁이게 한 적은 처음이었다. 그의 따옴표도, 느낌표도, 말줄임표도 내게 지극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왔다.

물론 그의 문장이 돌연 미끈해진 탓은 아니었을 게다. 소설 곳곳에서 여전히 덜컹대는 그의 문장과 마주하곤 했기 때문이다. 내 가슴을 달음박질하게 했던 건 외려 그의 매력적인 캐릭터들이다. ‘유준’이란 인물 위에 포개진 그의 청소년기가 그랬고, 일체의 사회적 질서에 침을 내뱉던 그의 벗들이 그랬다. 시험 기간을 거치면 죄다 사라져버리는 지식 대신 살아서 꿈틀대는 지혜를 찾겠다며 유준이 자퇴서를 내던질 때, 그와 벗들이 무전 여행으로 전국을 훑을 때, 나는 내 안의 원망공간(願望空間)을 끄집어 내는 전율을 경험했던 것이다.

인간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질서 속에서 안온할 테지만, 그 질서 안에 갇힐 때 온전하지 못할 테다. 견고한 질서에 맞섰던 유준과 그 벗들의 소년기가 눈부신 건 그래서다. 황석영은 ‘작가의 말’에서 “하고픈 일을 신나게 해내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태어난 이유”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너희들 하고 싶은대로 하라고 끊임없이 속삭이면서 다만 자기가 작정해둔 귀한 가치들을 끝까지 놓쳐선 안 된다”고 나즈막히 일러둔다.

하고픈 일을 신나게 하지도, 작정해둔 귀한 가치들을 고집스레 지키고 있지도 못한 오늘, 마음이 가난한 어느 해질녘 ‘개밥바라기 별’과 마주친다면 다만 목놓아 울어버릴 것 같다. 그 어느 때보다 나를 둘러싼 온갖 질서에 질식할 것만 같아서다. 소설에서 유준은, 아니 젊은 시절 황석영은, 일용직 노동자로 전국을 떠돈 일이 있다. 한일협정 반대시위로 끌려간 유치장에서 만난 깡다구 넘치는 한 노동자를 따라서다. 그 노동자의 농익은 한 마디는 그의 젊은 시절을 출렁이게 했다. “사람은 씨팔 ... 누구나 오늘을 사는거야”

그 오늘을, 작정해둔 귀한 가치를 따라, 하고픈 일을 신나게 하며 보낼 순 없을까. 서른을 훌쩍 넘기고서도 개밥바라기 별처럼 불안한 빛줄기만 새어나오고 있는 내 젊음이 한심스러워 하는 말이다.
  
이청준이 끝내 흙으로 돌아갔다. 문인의 부음을 듣고 눈물이 고인 건 처음이다. 세상을 문학적으로 바라보던 시절 그는 내 정신 세계를 틀어쥐고 있었다. 이청준의 소설엔 ‘전짓불’이 자주 나왔다. 그의 소설에서 주인공은 종종 답을 강요 받는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상대는 전짓불을 쏘며 어느 편이냐고 묻는다. 그는 전짓불을 파시즘의 메타포로 자주 썼다. 선생이 돌아가신 곳엔 그런 전짓불은 없다. 아무것도 강요받지 않는 저편 세상에서 맑은 글만 오래오래 쓰시기를.
  
                                 
                                               
여의도 국회의사당은 언어의 종말 처리장이다. 멀쩡한 사람도 배지를 달면 입이 험해진다. 정치 언어엔 권력 투쟁의 잔혹성이 그대로 덧칠돼 있다. 쏟아지는 정치 언어 앞에 국무총리도 장관도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다. 혹여 각료들이 의원들에게 대드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땐 동료 의원들이 죄다 튀어 올라와 “말버릇이 그게 뭐냐”며 호통친다.

대정부 질문이란 그런 정치 언어의 저급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이벤트다. 요 며칠 각료들은 긴급현안질의를 받느라 여의도 바닥을 오갔다. 의원들은 각료들을 거칠게 다뤘다. 나라 꼴이 이게 뭐냐고 꾸짖었다. 총리가 ‘의원님 말씀’에 토를 달다가 혼쭐이 났다. 국회의원의 목은 늘 빳빳하다. 악취나는 언어를 목구멍으로 뱉어내려면 도리 없다, 빳빳할 수밖에.

그들 틈에도 보석처럼 반짝이는 이들이 더러 있긴 하다. 주로 사회적 약자를 대신해 국회에 입주한 경우다. 민주노동당 곽정숙 의원이 그렇다. 그는 척추장애란 참혹한 운명을 타고났다. 긴급현안질의가 있던 날, 곽 의원은 종일 턱걸이하듯 책상에 매달려 있었다. 1미터 20센티미터를 겨우 넘는 키 때문이다. 건장한 남성 의원들이 신나게 각료들을 족칠 때, 척추장애로 쪼그라든 여성 의원은 한없이 높은 책상과 싸워야 했다.

턱걸이 하듯 책상에 매달려서도 곽 의원은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현안질의가 끝나자 의원들은 빳빳한 목을 풀고 사사로운 잡담을 시작했다. 와중에 곽 의원은 조용히 신상발언을 신청했다. 그가 작은 키로 몽당몽당 발언대로 걸어나올 때 의원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장애인이 국회에 들어오니까 많이 불편합니다. 저는 키가 작고 특별히 앉아 있을 때 불편함이 많아 제 몸에 맞는 좌석 개조가 필요합니다.” 이 말을 할 때 곽 의원은 얼굴을 무너뜨리며 웃었다. “저는 장애인 대표입니다. (불편한 책상을 쓰며) 제 앞가림도 못한다면 500만 장애인들이 저를 어떻게 신뢰하겠습니까.” 이 말을 내뱉을 때 곽 의원의 얼굴에선 비장함이 피어올랐다.

국회의장은 곽 의원에게 “곧 시정하겠다”는 의례적인 답변을 건넸다. 그러곤 나무 망치를 세번 두드려 폐회를 선언했다. 정치 언어를 배설한 의원들은 기름진 얼굴로 본회의장을 빠져나갔다. 곽 의원은 제 키만한 책상을 거슬러 몽당몽당 그들을 뒤따랐다. 그날 누구도 곽 의원의 책상에 대해 말하진 않았다.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선 정당한 언어가 늘 종말 처리된다.
  
시집은 대체로 얇다. 헌데 그 얇은 시집을 읽어내기란, 가슴으로 이해하기란 여간 힘들지 않다. 대부분의 텍스트는 머리의 이해를 기대하지만, 시는 다르다. 머리와 가슴이 함께 이해해야 시인의 손끝에서 떨리던 감성이 비로소 전해온다. 그래서 시를 이해하는 일은 적이 부담스럽다. 내가 이해라고 믿더라도 실은 오해일 가능성이 크다. 해서 다짐했다. 이해 대신 오해하기로. 이해란 가장 잘한 오해이고, 오해란 가장 적나라한 이해라고 하지 않던가.

그런데도 부담은 쉬 가시질 않는다. 멋부리는 오해라도 하기 위해선 흩뿌려진 시어를 머리 싸매고 꿰맞추는 노력이 앞서야 하는 까닭이다. 쉽게 말해 이를 악 물고 덤벼들지 않아선 그럴듯한 오해도 하기 힘들다. 그런데 어떤 시들은 가만히 읽기만 해도 그 감성이 전해오는 경우가 있다. 어이, 그냥 읽기만 해, 덮어놓고 문장에 가슴을 맡겨버려, 이런다. 홀가분하고 나른해진다.

그런 시는 대개 짧은 편이다. 감성이 돌아다닐 공간이 좁아서인지 모른다. 짧은 시편에 빼곡히 감성을 담아 놓아서인지 모른다. 그런 시는 또 이렇기도 하다. 요란한 세상에서 한발 비켜 서 있다. 아니, 요란한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 이면을 그린다. 누구도 주목하지 못했던 외딴 곳에서 지극히 서정적인 풍경을 길어낸다. 정현종의 다음 시편처럼.

교감

밤이 자기의 심정처럼
켜고 있는 街燈
붉고 따뜻한 가등의 정감을
흐르게 하는 안개

젖은 안개의 혀와
가등의 하염없는 혀가
서로의 가장 작은 소리까지도
빨아들이고 있는
눈물겨운 욕정의 친화

그렇잖아도 감성이 뛰어놀 공간이 좁은 마당에, 세상의 외진 곳이 그려내는 교감의 풍경이라니. 가슴이 흐르는대로 문장이 흐르는 그런 시는, 행복해라, 인간의 섬세한 감성이 빚어낸 꿈의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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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소설집 <엘리아의 제야>(문학과 지성사, 2003)를 재독하다.

앞질러 말하자면, 나는 꽉 짜여진 소설을 좋아한다. 김승옥, 오정희, 이인성 들의 소설이 그렇다. 그들의 소설은 대개 문장과 문장 사이가 치밀하며, 온갖 상징들로 질퍽해 읽기가 여간 녹록치 않다. 하지만 희뿌연 문장들을 어렵사리 헤치고 나오면, 흐릿하나마 견고한 소설의 구조와 마주치게 된다. 그 만남의 과정은 대체로 지난하지만, 문학이 일종의 유희라고 믿는 나는, 그‘고통의 향유’를 긍정하는 편이다.


나는 저널리스트 고종석과 에세이스트 고종석의 팬이지만, 소설가 고종석에겐 시큰둥한 편이다. 그의 소설엔 내가 앞질러 말한 ‘짜여짐’의 미학이 빠져있는 탓이다. 김훈을 제외하자면, 당대 최고의 미문가(美文家)라 불릴 만한 그이기에, 소설 위로 자유로이 흩뿌려진 문장은 눈부시게 아름답다. 그러나 그 문장들은 다만 아름답게 버려져 있어 하나의 견고한 구조를 빚어내지는 못하는 듯 보인다. 우리 문단에서, 그의 개별 문장이 지닌 독특한 지위에도 불구하고, 그 문장이 쌓아올린 소설의 구조가 문단의 장삼이사들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은 그래서다.

이 소설집도 마찬가지다. <엘리아의 제야>는 여섯 편의 중단편으로 묶인 에세이 형식의 소설집. 두 편을 제외하곤 ‘나’가 화자라는 점에서, 그리고 바로 그 ‘나’가 작가 고종석과 여러 번 겹친다는 점에서 에세이에 보다 가까운 소설들이다. 작가는 소설에서, 제 삶의 진국에 허구의 물을 마구 탄다. 툭툭 내뱉 듯 던지는 문장들은 군더더기 없는 미문들로 촘촘히 늘어서 있는데, 삶과 허구의 경계를 효과적으로 뭉개고 있다. “고종석은 박태원ㆍ최인훈 등 지식인으로서의 자질과 현실에 대한 성찰에 자유로운 서술적 문체를 특징으로 하는 ‘에세이 소설’의 전통을 잇고 있다”는 김병익의 진단은 그래서 옳다. 그러나 그 옳음에도 구멍은 있다.

구멍은 대개 소설의 헐거운 구조에서 비롯된다. 그의 지난 소설집 <제망매>에서부터 되풀이되는 ‘누이(들)’의 이미지는 지겹고, 때로 안이해 보인다. ‘나’가 중심화자가 되어 회상을 마구 풀어놓는 소설의 형식도 상투적이긴 매한가지다. 가령, 소설집의 꽁지에 실린 ‘카렌’을 보자. ‘카렌’에서 주인공 ‘나’와 아내 ‘화련’의 회상은 점프를 거듭하며 교차한다. 게다가 전라도 이야기며, 외국어 이야기로 회상이 자리를 바꾸어 앉기도 한다. 그 자유로운 회억의 과정을 “기억의 흐름을 거슬러 오르는 인간에 대한 품위와 연민을 담은”것으로 치켜세우는 이들도 있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은 소설의 구멍난 구조에 다름 아니다. 각각의 회상이 계산된 방식으로 교차하는 것이 아니다보니, 이런저런 잡담이 나열된 듯한 느낌마저 든다. 더구나 아내(화련)를 경상도 출신으로, 화자인 나(진우)를 전라도 출신으로 설정한 것도 적잖이 식상해 보인다. 소설을 ‘동서화합’으로까지 확장할 까닭도 없거니와, 그게 아니라면 굳이 소설의 많은 부분을 경상도와 전라도에 관한 회억으로 덧칠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하나 더. 이 소설집에서 변주되는 무수한 ‘나(들)’는, 다소 억지를 부린다면 단 하나의 ‘나’로 구겨넣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경제적으로 중산층이며, 어느 한 곳이 불완전한 남성이다. 직업은 기자이거나 시인 혹은 무직자이면서 ‘지식인’의 탈을 쓰고 있다. 그는 “누군가의 가랑이 밑을 지나(p.32.)”진 않았지만, 유약하고 심약한 룸펜으로 그려진다. 김병익의 옳은 지적처럼, 이는 지식인 소설의 한 전형이라 볼 수도 있겠으나, 나는 사회적 소수파를 옹호하는 개인주의자 고종석이 전형적인 지식인 소설을 생산하는 일이 불편하다. 그라면, 고종석이라면, 가질 만큼 가졌다는 중산층 지식인들이 세상을 내버리며 한탄조의 술잔을 기울이는 소설의 표정이 사회적 소수파들의 얼굴을 찌푸기게 할 것이라는 것쯤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으리라. 그가 혹 “소설 창작에 훌륭하게 성공”하기를 바랐다면, 스스로의 눈을 사회적 소수파에게로 바투 맞추는 일에도 바짝 신경을 기울었어야 했다.

이처럼 소설집엔 이런저런 구멍들이 나있고, 때문에 소설가 고종석에게 후한 점수를 주기란 곤란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나는 “이 소설집에서 건질 것은 고종석의 미문(들) 뿐이다”라고 선언하지 못한다. 그의 소설에 담긴 어떤 진실들은, 내 삶을 두어 번 곱씹게 하고, 그로써 가슴 찡한 문장 한 두 개를 새겨주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아빠와 크레파스’의 경우가 그렇다. 소설집에 실린 여섯 편의 소설 가운데 나는 ‘아빠와 크레파스’를 가장 잘 된 소설이라 평하는데, 그 구조야 어찌됐건 맨 마지막 문장이 내 눈물을 훔쳐냈기 때문이다. 문장을 그대로 옮긴다: “무엇보다도, 낙관과 자족이 중요합니다. 신이, 누구한테서든, 아무것도 남겨놓지 않고 몽땅 빼앗아가버리는 경우는 없습니다.”(p.169)

K.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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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은 종종 사랑의 대명사다. 모든 사랑이 그렇진 않지만, 어떤 사랑은 멜로디에, 특히 가사에 실려 깊이 감각되곤 한다. 헤어진 연인들이 유행가 가사에 목놓아 울어버리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더구나 함께 듣던 음악이라면 그 울음의 진폭은 더욱 증폭된다.

아예 음악으로 맺어진 사랑이라면 어떨까. ‘원스’는 사랑과 음악이 동일한 궤적을 그리는 영화다.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는 남자. 진공청소기 수리공인 이 남자는 실연의 아픔을, 극한의 그리움을 절규하듯 노래로 뱉어낸다. 그의 절규에 발걸음을 멈춘 여자. 여자 역시 사랑의 결핍을 음악(피아노 연주)으로 달래는 인물이다.

음악이 이야기를 근사하게 뒷받침하는 영화는 더러 있다. 아예 음악을 이야기하는 영화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음악과 이야기가 스미고 짜이면서 영상과 멜로디의 경계를 효과적으로 허물어낸 영화는 흔치 않다. ‘원스’는 이야기하듯 노래하고, 노래하듯 이야기하는 영화다. 두 남녀의 결핍의 순간들을 음악으로 꾹꾹 눌러 채워가며 소소한 사랑 이야기를 풀어낸다.

눅눅한 더블린의 풍경처럼 이 영화를 빼곡 채운 정서는 외로움이다. 텅 빈 거리에서라야 자작곡을 풀어내는 그 남자도, 몸을 한껏 움츠린 채 홀로 걸어가며 ‘If you want me’를 읊조리는 그 여자도 외로움에 휘감겨 하루하루를 견뎌내긴 매 한가지다.

영화에서 둘의 사랑이 격렬하게 번지지 않는 까닭도 (각자 다른 대상 때문에) 그들 내부에 퍼져 있는 이런 지독한 외로움의 정서 때문이다. 잔잔하게 시작했다 포르르 끝나버리는 이 영화는 사랑이 종종 외로움과 맞닿아있음을 노래하고 있다. 모든 사랑의 출발은 결핍이고, 그 결핍을 넉넉히 메우는 것 또한 사랑일테지만, 사랑은 자주 더 큰 외로움을 낳기도 한다.

K.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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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부는 날 자전거는 홀로 꼿꼿하다. 무작정 불어오는 풍경을 밀쳐내며 자전거는 거친 땅 위를 변주한다. 그럴 땐 자전거 위에 실린 내 육체도 바짝 조여온다. 바람과 바퀴가 빚어내는 변주가 내 육체를 들썩이고, 그 불규칙한 리듬을 따라 내 마음의 줄도 요동친다.

그날도 바람이 몹시 거셌다. 무언가에 홀린 듯 오후 네시까지 잠에 빠졌던 날이었다. 한 차례의 악몽과, 두 차례의 해석 불가능한 꿈을 꾼 뒤였다. 함박 젖은 땀에 섹섹 들리는 숨소리가 유쾌하지 않아 잠을 깼던 것 같다. 자전거를 끌고 나선 건 그런 흐느적이는 몸을 감당할 길이 없어서였다.

봄빛에 물든 일산은 눈부셨다. 세찬 바람에도 봄의 아름다움은 견고해 보였다. 아니, 거대한 폭풍이 이 모든 풍경을 날려버린다 해도 가루가 된 봄빛은 아름다울 터였다. 가루가 되어 흩날리는 봄빛 속을 내 흐믈대는 육체가 뚫고 지나갔다. 권태롭게 짓밟아대는 자전거 페달에 몸을 의탁한 채.

저녁 어스름이 가까워오는 시간인데도 호수는 제법 붐볐다. 한 무리의 청년들이 줄지어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고 지나갔다. 그들의 발사위를 따라 대지는 한결 매끄러워졌다. 인라인의 행렬이 한 차례 닦아낸 길위를 자전거는 덜컹거리며 뒤따랐다.

자전거 도로 위로 두 여성이 불쑥 뛰어들었다. 끼익 하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자전거 도로 위를 침범한 건 그들이었으나 그들을 나무랄 순 없었다. 바람 부는 날 자전거는 세상의 모든 풍경을 지워버리곤 한다. 지워진 풍경 속에서 두 여성은, 두 모녀는 서로를 꼭 껴안고 있었다. 중년의 여성이 여고생의 발그레한 뺨을 막 부비려던 찰나였다. 끼어든 건 외려 나였다. 사랑으로 충만한 모든 것들은 침범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이어폰에선 익숙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울먹이듯 들리는 노래가 아찔해 자전거를 급히 세웠다. 이날 하루를 뜨겁게 달구었을 빛은 호수 아래까지 내려와 있었다. 수면을 매만지듯 비취는 빛 아래로 호수가 들썩이고 있었다. 세찬 바람을 이기지 못한 탓일까. 호수는 더이상 출렁이지 않았다. 거대한 용암이 꿈틀대듯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울룩불룩 요동치는 수면을 껴안은 채 호수는 속수무책이었다.

봄의 호수를 거슬러 오는 길. 자전거도 나도 지친 듯 몹시 비틀댔다. 세상의 모든 소리도, 불어오는 모든 풍경도, 흩날리는 모든 봄빛도 이미 모습을 감춘 뒤였다. 권태로운 페달질을 거듭하며 나는 두 차례의 해석 불가능한 꿈을 떠올렸다. 바람 부는 날 일산의 호수는 오래도록 달궈진 냄비 같았다. 부글부글 끓고있는 호수를 보고 있자니 또다시 졸음이 쏟아졌다.

K.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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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은 언어화된 질서다. 언어가 그 환경을 따라 자연스레 체득되듯, 습관 역시 환경에 맞춰 스스로의 질서를 구축한다. 내게 ‘불면’이 습관인 것은 내 안에 상념이 쌓이는 환경 탓이고, ‘독서’가 습관인 것은 그 상념들을 내 쫓아야만 하는 내 특별한 환경 때문이다. 해야 할 일은 많고 가야할 길은 먼, 아니 어디로 가야할지조차 가늠하기 힘든 요사이의 내 특수한 사정말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차라리 다행이다. 이런저런 잡념을 쫓기 위해 글쪼가리를 하나라도 더 읽게 되니 말이다. 내가 탐독하는 몇몇 책들에 담긴 글조각 치고 내 단촐한 정신세계를 뛰어넘지 않는 글이 없다. 잡념을 쫓으려다 되려 생각 꾸러미를 더 얹는 격이 되곤 하지만 지성들의 글 한 줄이 내게는 이롭기만 하다. 그런 이로움마저 없었다면 나의 새벽은 얼마나 공허할까. 매일 새벽을 그런 공허함에 흘릴 생각을 하면 정말이지 아찔하다.

오늘 내 쪼그라든 새벽을 부풀린 이는 ‘이아무개’다. ‘이아무개’는 이현주 목사의 필명. 그는 제 존재에 대한 극도의 겸양의 표시로 제 필명을 ‘아무개’라는 불특정 대명사로 지칭한다. 잠을 청하다 실패하고 책을 읽는 내 습관은 오늘도 결코 오작동 하지 않는다. 그 습관적 독서가 가 닿은 곳이 바로 ‘이아무개’의 ‘사람의 길 예수의 길’이라는 에세이집. 내 가슴을 후벼파는 이야기들로 빼곡히 들어차있는 수작이다.

우선 책의 구성부터가 흥미롭다. 책은 2부로 구성되는데 앞의 1부는 시몬 베드로가 화자이고, 2부는 예수가 화자로 등장한다. 물론 ‘이아무개’가 임의로 그렇게 설정한 것이다. 그런데 그 설정이 끌어내는 감동의 깊이가 어지간하다. 자신의 배신을 참회하는 베드로의 낮은 목소리는 예수에 대한 배신을 밥 먹듯 하는 내 목소리인 것만 같다. 가시 면류관을 쓴 채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절규는 내 심장에 가시가 되어 박힌다. 그 자신 정치범이 아님에도 정치범으로 몰려죽은 예수가 ‘억압받는 이들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정치범이 되어 죽겠다’라 말하는 대목에선 예수가 내 가슴을 찢고 걸어 들어오는 착각마저 든다.

그 속절없는 회한과 착각 속에서, 나는 소스라치듯 놀라며 나를 규정하는 또 하나의 습관을 떠올린다. 불면의 습관보다 고약하고, 독서의 습관이 주는 한줌의 유익도 없는, 오히려 해악인 그 습관. 밤낮 예수 정신이 어쩌고를 떠들면서, 심지어 겁도 없이 ‘맑스를 넘어 예수를 좇아’라는 가당치도 않는 인생관을 떠들면서도, 단 하루도 그를 따라 살지 못하는 내 몹쓸 습관. 이아무개가 시몬의 입을 빌려 에두르듯 뱉어내는 참회는 그 누구보다 나의 몫이어야 한다. 약한 자 편에서 사랑으로 세상을 덮어버린 그 예수의 ‘쿨함’에 나는 그저 멋스러움을 느꼈을지 모른다. 다년간 교회를 통해 알던 박제화된 예수가 아닌 꼿꼿이 살아있는 그 예수를 발견하며 나는 단지 그 정의로움에 반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예수처럼’을 입버릇처럼 말하면서 마치 내가 정의로운 양 행세했을 지도 모른다. 정작 내가 닮아가야할 예수는 내 심연의 감옥에 꽁꽁 가두어둔 채.

이아무개는 이런 일화를 전한다. 그가 시국의 여파에 밀려 독방 감옥에 갇히던 날 이야기다. 감옥 문이 열리고 발을 들여 놓는데 누군가 말을 걸더란다. “이제 오니?” 분명 독방인데 누군가 했더니 담요 뭉치였다고 한다. 그런데 잠시 후 또 목소리가 들려온다. “많이 기다렸단다, 이아무개야” 짐작하다시피 이아무개가 전하는 그 누군가는 예수였다. 물론 이것은 이아무개가 다소 상징적 의미로 자신의 체험을 전하고 있는 것일 테다. 하지만 그의 일화는 오늘 나의 수치스러움과 정확히 공명한다. 내 심연의 감옥에 정의의 예수, 약한 자의 예수, 해방자 예수를 가두어 둔 채, 더러운 입만 나불대는 내 위악한 습관. 그 악취나는 질서. 나는 그 습관의 감옥에서 예수를 구출할 수 있을까. 그리하여 내가 오히려 그 안에 갇힐 자신이 있는 걸까. 하기야 입만 떠들고 근육은 꼼짝하지 않는 내 못된 습관이 어디 예수 정신뿐이랴: 나는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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