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밤빛깔은 붉은색이다. 형형색색의 네온이 무리를 이룰 때, 빛은 외줄기로 붉다. 그 빛의 절반은 밤을 유흥하는 자들의 몫이고, 나머지 반은 십자가의 것이다. 서울 상공에서, 속세의 유흥과 십자가의 신성함은 분별되지 않는다. 유흥업소의 네온만큼 십자가도 많다. 대략 300미터에 하나 꼴로 십자가가 솟아있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저 많은 십자가가 다 예수의 것이라면, 세상은 마땅히 매끄러운 곳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질감은 늘 거칠다.

우리 동네에 새 십자가가 솟았다. 빌딩 한 귀퉁이에 간판이 걸렸다. 목사 얼굴이 반, 그의 프로필이 반을 차지하고 있다. 간판은 목사가 유수한 대학을 나왔고, 몇 권의 책을 썼음을 말하고 있었다. 목사가 잘나야 교회가 잘 된다는 것은 이 나라 개신교의 오랜 믿음이었다. 그래서 잘나가는 목사가 되려면 신학교만 나와서 될 일이 아니다. 제법 괜찮은 대학 간판 하나쯤은 들고 있어야 된다. 유학을 다녀오면 더 좋다. 그래야 입소문을 타고 교인들도 몰려든다.

그러나 잘난 목사가 부족해서 저 많은 십자가가 속세에 파묻힌 것은 아닐 테다. 오히려 제 잘남을 내세워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는 목사들의 욕망이 문제다. 그 욕망은 예수의 것이 아니다. 세속의 것이다. 세속의 욕망은 끝끝내 종교와 세속의 경계를 뭉갤 것이다. 종교란 세속사회 속의 종교일 때 마땅할 테지만, 그 세속과 구별되지 않는 종교는 종교가 아닐 것이다. 간판 속 목사의 기름진 얼굴은 그것을 압축하여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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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번을 자판 앞에 앉고도 종일 한줄의 글도 쓰지 못했다. 껌뻑이는 모니터만 바라보다 하릴없이 스페이스 바만 못살게 굴었다. 머리통이 이런저런 생각으로 빼곡할 때, 그래서 토해낼 말이 너무나 많을 때, 글은 손끝에서 자꾸만 미끌어진다. 가슴으로 수만자의 글을 쓰고도 단 한줄도 밖으로 내뱉지 못한 오늘. 저녁 어스름을 내다보며 빌어먹을 한숨만 삼켜냈다. 넋을 가진 인간은 우주에 복종하지 않는다는데. 또 그렇게 하루가 가는구나. 오늘도 멀리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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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바람이 내 얼굴을 쓱 문지른다. 바람이 부는 쪽으로 등을 돌려보려 하지만 어디서 불어오는지조차 가늠하기 힘들다. 숨이 막힐 정도로 매서운 바람이 종일 들어차고 나가길 되풀이한다. 지퍼를 목까지 끌어올려도 가슴으로 심장으로 바람이 파고든다. 전날 한뼘쯤 얼굴을 내민 봄바람에 덜컥 속아버린 내 탓이다. 겨울이 가버렸나 싶어 옷을 두텁게 챙기질 못했다. 한해의 시작과 끝이 동시에 존재하는 겨울은 환(幻)의 계절이라지. 얼얼한 기운에 머릿속마저 얼어버리면 우리의 정신은 종종 몽롱해진다. 겨울 바람이 매서우면 매서울수록 더더욱.

찬 바람을 뚫고 오후엔 제법 걸었다. 핸들이 휘어버려 수리를 맡긴 자동차를 찾으러 나선 길이었다. 주말을 맞이한 일산에선 부산함을 찾을 수 없었다.매서운 날씨에 몽롱해진 사람들이 제 방 안으로 숨어버린 탓이리라. 길 건너편 행인의 구둣발 소리가 또각또각 들릴 정도로 주말 오후의 도시는 적막했다.

귀를 꼭 감싸쥔 채 알미 공원 앞을 지나는데 털모자에 털장갑, 마스크까지 걸친 중년 부부가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습관처럼 먼 곳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서로 아무런 말도 없이 그렇게 한참을 시선을 자꾸만 먼곳으로 달아나게 내버려두고 있었다. 무엇이 저들을 저토록 심드렁하게 만들었을까. 그들은 참을 수 없는 권태를 겨우겨우 구겨넣은 채 일상을 견디는 듯 보였다.

자동차는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했다. 핸들이 조금 휘었나보다 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차 밑바닥 부품을 싹 갈아야했다. 수리비만 35만원. 적지 않은 돈을 들여 핸들은 제 방향을 찾았다. 찻길에서 핸들을 꺽어 잡아야하는 불편함도 사라졌다. 거짓말처럼 자동차는 핸들이 지시하는대로 움직이는 원래 상태를 회복했다. 우리 삶도 그럴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쪽 한 구석이 심하게 망가졌군요. 수리비만 지불하면 깨끗하게 복원시켜 드리죠.

제 모습을 찾은 핸들을 잡고 서점으로 차를 몰았다. 마음이 스산할 때 의욕이 밑바닥을 칠 때 자주 찾는 곳이다. 한달새 참고서 코너가 확 넓어졌다. 그런데도 여전히 인문 분야는 부실하다. 인간을 고민하기보다 인간을 짓밟아야 살아남는 세계에선 당연할 일일 것이다.

이동진의 책을 엿보다가 ‘비포선셋’이란 영화를 떠올렸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하룻밤 사랑을 나눈 제시와 셀린('비포 선라이즈')의 9년 뒤 이야기다. 제시와 셀린은 단 하룻밤에 제 생애 전체에 걸쳐 풀어내야할 사랑을 한꺼번에 쏟아버린 채 이별한다. 6개월 뒤 빈 기차역에서 만나자는 약속만 남긴 채. 둘은 다시 만났을까. ‘비포선셋’은 빈 역에서의 이별 이후의 이야기다.

9년 뒤 제시는 소설가로, 셀린은 환경운동가로 살아간다. 둘의 하룻밤 이야기를 소설로 써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제시가 파리를 방문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제시의 인터뷰가 한창인 헌책방(Shakespeare and company)으로 셀린이 찾아가면서 둘은 9년만에 재회한다. 빈의 하룻밤 이후 6개월 뒤 만나자는 약속은 실현됐을까. 제시는 빈 역에서 기다렸지만 셀린은 나타나지 않았다. 할머니의 갑작스런 죽음 때문이었다. 모든 걸 쏟아부었던 사랑과 기약없는 이별, 그리고 9년 뒤의 재회. 둘의 사랑은 어떻게 됐을까.

예전에 흘려봤었던, 흔해 빠진 사랑 이야기일 이 영화를 다시한번 끄집어내 봤다. 영화 속에 담긴 파리는 낡아서 아름다웠다. 9년이란 세월을 빨아들인 제시와 셀린은 낡았으나 아름다운 사랑을 조심스레 확인해간다. 서로의 손을 잡을 듯 말듯, 머리를 쓰다듬을 듯 말듯 조심스러워하며 파리지앵의 뒷골목을 걸으면서. 비행기 출발 시간을 2시간 남겨두고 시작된 둘의 9년만의 재회는 헤어짐의 순간을 네번이나 지연시키며 끊어질듯 이어진다. 제시는 그간 결혼을 했고 아들을 낳았다. 셀린은 종군 기자인 애인을 두고 있다. 무심한듯 서로의 안부를 묻던 둘은 9년전 하룻밤 속으로 다시 빨려들어 간다.

또 한번 이별의 순간이 다가오는 자동차 안에서 “그날 밤 모든 사랑을 쏟아내버려 이제 사랑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하며 셀린은 고통스러워 한다. 제시는 “결혼식 직전에도 당신을 떠올렸다”며 함께 아파한다. 오랜 세월을 삼켜 내고서야 곁에 서게 된 둘은 9년 전 젊음이 그랬듯 재회를 확신하는 이별에 선뜻 몸을 맡기지 못한다. 제시는 시계를 번갈아보며 “조금만 더….”를 몇번이고 내뱉으며 이별을 지연시킨다. 그러면서 "기차역에서 당신이 나를 외면하고 지나치는 꿈을 꾼다"며 9년간 이어진 악몽을 들려준다. 그리고 마침내 들리는 셀린의 노래. “그대에겐 하룻밤의 추억이었을지 몰라도 내게는 소중했던 시간. 그날은 나의 전부랍니다. 그런 사랑은 처음이었지요.”

입밖으로 내뱉은 낭만의 말은 사랑을 들뜨게 하지만, 결국 사랑을 지탱하는 건 심장으로 삼켜낸 연민일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말줄임표처럼 미처 내뱉지 못한 사랑의 말은 연민의 가슴으로 대신 남아 따스한 온기를 유지한다. 사랑이란 격정적일 때 가장 또렷할 테지만, 해질 무렵 느릿느릿 늘어지는 노을처럼 따뜻한 연민이 없고서야 그 사랑의 견고함을 따지긴 어려울 테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이렇다. 연민인듯 사랑인듯 9년의 세월을 훌쩍 흘려보낸 둘은 셀린의 방안에 있다. 시간은 째깍째깍 흐르고 비행기 시간은 다가온다. 니나 시몬의 노래에 몸을 흐느적대던 셀린이 말한다. "자기, 이러다가 비행기 놓쳐." 피식 웃으며 제시가 던지는 대답. "알아" 제시는 결국 셀린의 방에 남았을까. '우-우-' 바람 소리에 창문이 들썩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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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에 기대어 질문 하나. 경제성장이 안 되면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이 부정 의문문에 단호하게 ‘그렇다’라고 답한다면, 이 책을 찬찬히 읽어볼 것을 권한다. 난삽한 개념 하나 없이도 자본주의의, 특히 신자유주의의 모순 덩어리를 효과적으로 까발리고 있다. 책은 엉성한 문장들의 행렬처럼 보이지만, 누런색 재생 종이(녹생평론사의 책이 짚단처럼 가벼운 이유다)에 담긴 지혜는 백만번이라도 곱씹어볼 만한다. “경제를 살리겠습니다”라는 구호로 대통령을 거저 먹을 수 있는 시대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경제 발전’의 이데올로기는 사람들의 ‘불안’을 재료 삼아 작동한다. 인간 일반을 ‘노동자-소비자’로 가둔 것은 20세기 들어 훌쩍 커버린 자본주의의 작품이다. 죽어라 일하지 않으면 소비할 수 없으리란(풍요롭지 못하리란) 불안감이 이 사회를 지탱하는 힘이다. 경제성장이 곧 지구를 파멸하는 일이며, 인간성을 말살하는 일이란 건 이제 교양인의 상식이지만 결코 ‘표면의 상식’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극단의 소비가 우리의 목을 겨누고 있다는 사실도 짐짓 모른체 한다. 우리의 목줄을 쥔 자본이 그렇게 한다. 자본은 증권 시황 읽듯 죽어라 ‘경제를 살리자’고 외쳐댄다. 그것이 가멸찬 착취와 적절한 이윤을 합리화해주기 때문이다.

책은 ‘제로 성장’을 예찬한다. 경제 성장을 멈추는 일이 그토록 끔찍한가. 그럼 잠시 과거를 돌아보자. 핸드폰도 자동차도 컴퓨터도 없던 시절을. 그 시절에도 우리에겐 웃음이 있었고, 더 큰 행복이 있었다. 그런 물건에 대한 필요성을 느낄 수 없으니 소비 욕구도 없었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인간에겐 ‘임금 노동’ 역시 낯선 제도였다. 유럽이 식민지 건설에 열을 올릴 때 가장 애먹었던 일이 이 부분이라고 한다. 돈을 주며 아무리 일하라고 해도 현지인들은 하루쯤 일하곤 안 나온다는 것이다. 이미 필요한 것을 살 만큼의 돈을 구했기 때문이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같이 일한다는 건 그들로선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더글러스 러미스는 ‘대항발전(counter-development)’이란 개념을 제안한다. 인간사회에서 경제 요소를 줄이고, 경제 이외의 인간활동과 시장 이외의 모든 즐거움과 문화를 발전시키자는 뜻이다. 교환가치가 높은 것은 줄이고 사용가치가 높은 것은 늘리자는 제안이다. 쉽게 말해 노동자-소비자의 굴레를 벗고 하기 싫은 일은 줄이고, 하고 싶은 일은 늘리자는 거다. 경제성장을 지속적으로 하지 않아도(아니 하지 않아야) 환경은 보존되고 인간은 그 자체의 행복을 찾을 수 있으리란 전망이다.

성장을 멈추면 어떻게 될까. 역시 분배의 문제로 돌아온다. 흔히들 파이를 키워 나누는 게 낫지 않냐고 말한다. 거짓말이다. 주변을 둘러보라. 우리 경제의 파이는 끝없이 커져왔지만 빈부 격차는 외려 확장을 거듭하고 있다. 그러니 정책을 주무르는 자들아, 더 이상 파이를 키우자 따위의 감언이설은 하지 마라. 대신 정치 본연으로 돌아와라. 분배는 정의의 문제다. 정의는 경제의 영역이 아니다. 경제학에선 정의를 가르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회사 사장’을 대통령으로 뽑아 놓은 나라에선 정의가 앞서지 않는다. “돈을 벌지 못한 건 게으르기 때문”이란 경제학적 사고가 퍼져있을 뿐이다.

이 땅의 장삼이사들은 분노해야 한다. 나는 내 부모가 게을러서 부를 축적하지 못했다고 생각지 않는다. 문제는 더 많이 빼앗고 더 많이 착취해 우리를 노동자-소비자로 가둬두려는 부정의한 정사(政事)에 있다. 정의는 정치의 용어다. 양극화는 “경제를 살리자”는 구호로 풀리지 않는다. 그것이 심화되는 구조를 뜯어 고치는 건 정치의 영역이다. 그러므로 맥없는 시대여, 가련하다. “정치는 모르지만 경제 하나는 확실히 안다”는 대통령이 25일 취임식을 치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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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사가 환멸스러우면 자연으로 달아나기 마련이다. 눅눅한 새벽 돌연 바다가 보고 싶어지는 것도 그런 까닭에서일 게다. 미래는 캄캄하고, 현재는 고통스러울 때 나는 습관처럼 과거로 뒷걸음친다. 확실히 오늘보단 어제가 인간에 한층 더 가까운 것 같다. 지난 추억을 그렇게 극단까지 밀어붙이다 보면 우리는 자연과 마주친다. 인간도 맨 처음엔, 아니 종국엔 자연의 일부일 테니까.

이시영 시인은 아무래도 양 극단을 체험한 듯하다. 80년대를 통과하며 인간사의 잔혹함을 체험했을 그는 90년대의 문을 열며 자연으로 뒷걸음친다. 그 전환의 시기에 그의 시집 ‘무늬’가 있다. 그는 시집 곳곳에서 인간을 노래하길 멈췄음을 선언한다. 대신 인간의 자리를 자연에 내준다. 그가 인간을 노래하는 일은 “막 얼어붙은 폭포의 숨결('노래')”과도 같다. 그는 얼어붙은 노래를 자연이 해결하리라 믿는다. 그래서 “내년 봄이 올 때까지 거기 있어라. 다른 입김이 와서 그대를 녹여줄 때까지(같은 시)”라고 쓴다.

그러나 시인의 자연은 인간과 동 떨어진 세계가 아니다. 그는 차라리 자연으로 인간을 노래하는 편이다. 그가 시적 대상으로 삼은 것은 대부분 산,나무,돌과 같은 자연이지만, 결국 그의 입김은 인간에 닿아있다. 자연과 인간이 살과 살을 부비는 세계를 그는 노래한다. 그래서 자연으로 시작한 시는 인간으로 은근히 끝나곤 한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시편.

“아카시아들이 다투어 포도 위에 샛노란 꽃방석을 깔았다/아가씨들보다 아가씨들 품에 안긴 개들이 먼저 사뿐히 뛰어내린다/이런 날 아스팔트도 단 한번 인간의 얼굴을 한다”(‘풍경’ 전문)

“나뭇잎들이 포도 위에 다소곳이 내린다/저 잎새 그늘을 따라 가겠다는 사람이 옛날에 있었다”(‘무늬’전문)

시인은 자신이 줄곧 자연을 노래하는 까닭을, 그 속 사정을 보다 직접적으로 내비치기도 한다. 이럴 때 그의 노래는 포르르 내려 앉는 새들의 소리가 아니라, 오렌지 불빛 가득한 새벽녘 포장마차의 두터운 한숨 소리와 같다. 그는 자연을 잠시 내려놓고 곧장 인간으로 들어간다. 인간 본연의 세계에서 이탈해 짐승들의 세계를 살고 있을 불특정 다수를 ‘그’라 지칭하면서.

“젊어 한때 그는 제복 단추를 풀어헤치고/거리의 데모 대열에 뛰어들어 큰 소리로 외치고 싶었지만/어머니와의 약속 때문에 그것을 망설였고/늙어 한때 그는 일 속에서 빠져나와/고향의 숲길을 싫도록 걷고 싶었지만/상사와의 결재 서류 때문에 그것을 한번도 이행하지 못했다/그리고 그는 이제 늙은 퇴직자가 되어/공원의 벤치 위에 앉아 탄식한다/이것이 나의 삶이었는가” (‘그’ 일부)

“이것이 나의 삶인가” 한번쯤 자문해본 사람은 안다. 무수한 ‘그’들이 왜 데모도, 고향 숲길도 지운 채 살아야만 하는지를. 시인은 “그에게는 유난히 지켜야할 깨알같은 약속들이 너무 많았다”라고 말한다. 자연을 듬뿍 담은 이 시집은 어쩌면 그 깨알같은 약속에 제 삶을 저당잡힌 인간에 바치는 헌정시이다. 아니, 이 표현은 너무 한가롭다. 시집은 차라리 늦지 않도록 서둘러 깨알같은 약속에서 달아나라고 채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시인의 눈길은 마침내 고향에 닿는다. 유년의 맨 윗목. 인간의 얼굴로 인간의 놀이로 인간과 인간이 교감하던 곳. 그는 ”내 생애 그런 기쁜 길이 남아 있을까(‘마음의 고향4’)”라고 반문한다. “막 떠오르기 시작한 아침 해에 함뿍 젖은 아랫도리가 모락모락 흰 김을 뿜으면 빤짝이던 (…) 작은 청개구리가 영롱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팔짝 튀어 달아나던/내 생에 그런 기쁜 길을 다시 한번 걸을 수 있을까(같은 시)”라며 탄식한다.

그는 인간의 극단은 자연이며, 그 원망(願望) 공간은 고향이라고 핏대 세워 노래하는 듯하다. 자연과 인간이 버성김 없이 직조된 시는 드물다. 인간의 문제를 자연으로 풀어내는 시인의 솜씨가 어지간하다. 이 시집을 읽는 데 한 시간이면 족하다.“이것이 나의 삶인가”라는 물음이 스스로를 짓누르고 있는 이 땅의 모든 ‘그’들에게 이 시집을 권한다: 너에게 시영을 강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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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에도 살이 붙는가. 부쩍 내 눈물이 무거워졌다. 뺨을 따라 천천히 흐르는 법이 없다. 눈가가 촉촉해지는가 싶으면 그대로 후두둑 떨어지고 만다. 나이가 들면 눈물의 저울추도 기우나보다. 더구나 요사이 눈물의 양도 눈에 띄게 늘어 당혹스러울 때가 많다. 어릴적 찰랑이던 내 눈물샘이 첨벙대는 소리로 가득찬다.

눈물의 고삐가 풀려버린 건 그 장면에서였다. 시즈루와 마코토의 키스. 수년간 그를 마음 속 깊이 품었던 여자 ‘아이’는 사진 콘테스트에 도전하겠다며 그와의 키스를 제안했다. 사랑을 하고 성숙할수록 죽음에 가까워지는 아이가 제 삶의 방향을 정한 것이다. 사랑을 향해 뚜벅뚜벅, 죽음을 향해 성큼성큼. 눈먼 키스를 나누며 마코토는 비로소 시즈루가 자신의 심장에 들러붙었음을 깨닫는다. 떠나는 그의 등에 대고 시즈루가 말한다. “방금 키스에 조금은 사랑이 있었을까”

이 말은 시즈루가 마코토에 건넨 마지막 말이 됐다. 사랑을 택한 시즈루는 아이의 티를 벗고 여인이 됐으며, 뉴욕을 홀로 떠돌다 죽음을 맞는다. “사랑하면 죽는 병”이라고 했던 시즈루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죽은 시즈루의 뉴욕 사진전에는 둘의 키스가 담긴 사진이 눈부시게 내걸렸다. ‘생애 단 한번의 키스, 단 한번의 사랑’이란 문구와 함께. 사진 앞에 넋을 놓아버린 마코토는 3년전 "조금은 사랑이 있었을까"라고 물은 시즈루에 나즈막히 답한다. “있었어. 조금이 아니었어. 너는 내 세상의 모든 것이었어.”

선뜻 손 내밀지 못한 사랑은 다만 아픈 것인가. 후두둑 쏟아져버린 눈물을 해독하는 데 제법 시간이 걸렸다. 시즈루와 마코토의 '단 한번의' 키스는 엇갈려버린 운명에 대한 애린만을 머금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그 지독한 운명 앞에 그저 꺼이꺼이 울어버려야 하는 걸까. 그러나 영화는 꽃피기 직전 아름답게 몽우리져버린 것도 사랑이라 말한다. 망자가 돼버린 시즈루의 사진전에서 발길을 돌리며 마코토는 활짝 웃어보인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50통이나 되는 시즈루의 편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후 일본으로 한통씩 배달되는 죽은 시즈루의 늦은 편지. 제 심장에 박힌 시즈루를 느릿느릿 끄집어내며, 그는 채 피우지 못한 제 사랑을 소중히 감싼다.

사랑하고 이별하는 일은 아마도 우리의 의지와 별 상관없이 벌어지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의지가 사랑을 넘볼 여지는 단호하게 없다. 의지가 사랑을 키우거나 소멸시키는 것도 아니다. 사랑이란 ‘다만’ 사랑하는 것이다. 시즈루가 마코토의 연인이었던 미유키에게 손을 내밀 듯. 그래서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고 싶었을 뿐"이라며 제 사랑의 아득한 깊이를 고자질하듯. 그렇게 ‘다만’ 빠져드는 것이 사랑이다. ‘다만, 널 사랑하고 있어’란 영화의 제목은 그래서 사랑에 빠진 모든 연인들의 ‘신앙고백’이어야 한다. 사랑의 강물 아래로 빠져든 이들은 다만 껴안고 사랑해야 한다. 그 강물이 어느 순간 물길을 돌릴지, 아니면 망망대해로 흘러들지 우리로선 속수무책이다. 사랑은 그토록 속수무책인 것이라서 다만 아름다운 것인가보다. 내 무거운 눈물이 재잘대는 소리를 이제는 알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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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식도, 자아도, 꿈도 무한대 확장을 거듭하던 시절. 2002년 영국에서의 1년이 그랬다. 스물 여섯. 그 사랑스런 나이에 나는 이렇게 살 수도 저렇게 살 수도 있을 거라 믿었다. 세상에 항복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오늘. 나는 낡은 사진 만큼이나 팍팍한 질감의 일상을 그저 견뎌내며 살고 있다. '항복이 곧 행복'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그렇게 둥둥 떠다니고 있다. 그래선가 보다. 문득 2002년의 영국이 참을 수 없을 만큼 그리워질 때가 많다. 내 낡은 책상 안에 갇혀 있던 2002년의 몇몇 기억을 꺼내봤다. 사진의 질감이 퍽 거칠다.

#1. 2002년 여름. 에딘버러 성, 76파운드에 자동차를 빌려 스코틀랜드를 넘어 하일랜드까지 내쳐 달렸던 기억.

#2. 옥스포드. 내가 살던 첼튼엄에서 1시간30분이면 닿았던 곳. 지성의 꼭대기에 있는 그곳을 주말이면 하릴없이 찾곤했다. 옥스포드 거리를 따라 흘러다니면 그렇게 정신이 맑아질 수 없었다. 세상의 모든 지식을 빨아들일 듯한 기세로 캠퍼스 곳곳을 훑곤 했다. 인근 고서점을 뒤지면 간혹 가슴 떨리는 책을 손에 넣을 수도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알튀세르의 '맑스를 위하여(For Marx)' 영문판. 덮어놓고 붉은색으로 덧칠된 표지가 인상적이었다. 완독했냐고? ㅎㅎ 한 4개월쯤 걸렸나???  

#3. 첼튼엄 중앙 광장 앞. "한국인이 제일 적은 곳이 어딘가요?" 2002년 무작정 떠났던 영국 길은 이름도 낯선 첼튼엄에 닿았다. 한국 학생이 제일 적다는 이유에서였다. 한국말을 적게 쓰면 영어가 늘겠지, 하는 유치한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땐 한국인이 적으면 적을수록 그 집단화가 더 심화되리란 생각을 못했다. 한국인은 적었지만 그 친밀도의 점성은 매우 강해서, 주말이면 어울리는 일이 잦았다. 덕분에 첼튼엄에서 사귄 친구들과는 지금도 끈끈함을 유지하는 편이다. 인구 10만의 이 작은 도시에서 나는 노동을 했고, 공부를 했고, 또 인간을 배웠다.  

#4. 영국에서 마지막 4개월을 함께 보낸 우리 식구들. 이런, 주인 아저씨의 이름이 가물가물하군. 여하튼 일본에서 4년간 살다온 이 영국 가장은 여느 영국 남성과 달리 제법 가부장적이어서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정원을 개조한다며 2년째 앞 마당을 뒤집어 놓은 채 내평겨쳤던 이력도...ㅋㅋ..아, 또 있다. 일본에서 살면서 한국에 잠시 들렀다는 이 영국인은 나와 밤늦은 술도 가끔 기울였다. 어느날 귀한 술이라며 내게 슬쩍 보여준 것은 .... 바로 진로 '참이슬' 팩. ㅋㅋ 다시 첼튼엄을 갈 기회가 생기면 참이슬 한 박스를 선물해줘야겠다. 아, 저 왼쪽 아래 꼬마 아이는 이름이 또렷이 기억난다. 엘리자베스. 아침에 등교하려고 자전거를 끌고 나오면 졸졸 따라와 뺨에 뽀뽀를 해주곤 했다. 많이 컸겠지?

#5. CILC 같은 반 친구들. 이태리에서 터키에서 중국에서 온, 나보다 두어살 어린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다. 이 친구들과 어울려 한잔하면서 익힌 영어가 제법 두텁다.


 
#6. 2002년 상반기. 같은 플랏에 살던 식구들. 가운데가 동갑나기 프랑스 친구 카리마. 헤어진 남자 친구 생각에 늘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소설가 지망생(노트북에 꽁꽁 숨겨놓은 습작을 읽어봤는데 발군이었다)인 아영 누나, 잘 나가던 간호사 생활을 접고 영국으로 '튄' 미영 누나, 그리고 나와 티격태격했던 현오...어떻게들 지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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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삶이 투옥될 때 영웅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감옥 문을 나설 때, 등 뒤에서 철문이 닫히고 일상으로 뛰어드는 순간 비로소 영웅의 삶이 작동한다. 땀과 피로 얼룩진 일상을 견뎌내는 자. 그가 바로 영웅이다. 일상을 견뎌내기란 쉽지 않다. 일상은 대개 불확정적이어서 무서운 것이기 때문이다. 서서히 침몰하거나 가만히 떠오르는 무수한 일상(들)의 집합이 곧 삶이다. 그 일상을 묵묵히 견뎌낼 때 이 땅의 모든 ‘장삼이사’는 영웅이 될 수 있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그런 영웅들의 이야기다. 일상을 견디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쥐어 짜낸 여성들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더구나 영화는 여자 핸드볼 선수라는 ‘마이너리티’의 ‘마이너리티’를 전면에 내세웠다. 자본의 잔치로 전락한 스포츠의 변두리를 서성대는 핸드볼. 그 작은 공으로 밥벌이를 하는 여성들. 그들은 가슴 아릴 만큼 팍팍한 일상을 견뎌낸다. 일상을 견뎌낸 모든 인간은 영웅의 칭호를 받을 수 있음을 영화는 또박또박 말해준다.

영화는 여성들의 새떼 울음같은 소리로 시작한다. 타이틀이 채 모습을 드러내기도 전에 여자 핸드볼 선수들의 소프라노 톤 구호부터 들려온다. 대부분 힘을 내자는 “화이팅”이거나 공을 달라는 “여기”와 같은 소리다. 그러나 그 모든 소리는 “언니”란 말로 뭉쳐 들리기도 한다. ‘언니’란 우리말은 여성들 사이의 관계를 드러내는 일상어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 목소리에 실린 “언니”란 말은 그래서 이 영화가 우리 주변의 평범한 여성-언니에 주목하고 있음을 또렷이 알려준다.

영화에서 핸드볼은 다양한 처지의 여성-언니들을 동그랗게 엮어내는 매개로 그려진다. 일곱 여성들의 일곱 빛깔 일상은 코트 위에 흩뿌려진 땀 속에서 무리 없이 하나로 뭉쳐진다. 코트 위 여성들 사이를 오가는 공은 그들의 사연 많은 일상과 일상을 교감하게 한다. 남편 빚을 갚고자 공을 다시 잡은 미숙(문소리)과 젊은 날 실패했던 사랑을 감독으로 마주치게 된 혜경(김정은), 그리고 남편의 사랑을 받지만 코트에선 늘 뒷전에 물러나 있던 정란(김지영)은 동그란 공을 주고받으며 소통한다.

영화는 이들의 소통이 숨가쁘게 오가는 현장을 따라간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이 그 무대다. 스스로의 일상을 견뎌낸 여성들은 지중해 너머 승전보를 날려온다. 하지만 일상을 견뎌낸 대가가 꼭 객관적 지표로서의 ‘성공’일 까닭은 없다. 자신의 일상 앞에 당당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것이 마이너리티의 일상이었다면 더욱 그렇다. 소외된 일상을 묵묵히 견딘 자. 그가 영웅이다. 미숙이 남편의 자살 기도 소식을 들은 직후 “그 인간 약 먹는 타이밍 하고는….”하고 심드렁하게 내뱉을 때, 결승전을 앞두고 의식 잃은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나 포기 안해”라고 말한 뒤 코트로 돌아올 때, 우리는 이미 영웅의 모습을 감지한다.

익히 알고 있듯(실화가 이야기의 밑그림이므로) 코트 위 여성-언니들은 결승전에서 좌절한다. 마지막 순간에 무너진 미숙의 얼굴을 프레임 밖으로 밀어낸 건 영웅의 좌절을 감추기 위함이 아니다. 미숙의 얼굴이 빠진 프레임 안에서 한쪽은 뛸 듯 기뻐하고 다른 한쪽은 털썩 주저 앉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서서히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는 미숙의 얼굴. 얼굴을 무너뜨리며 우는 미숙의 얼굴 위로 이야기의 실제 주인공들의 얼굴이 겹쳐진다. 그러나 온몸의 진액을 짜낸 듯한 실제 여성-언니들의 얼굴은 실패의 그늘에 가려져 있지 않다. 눈물과 땀으로 범벅된 그들의 얼굴은 마침내 지독한 일상을 견녀냈음을 안도하는 표정이다.

여성들의 새떼 울음같은 소리로 시작한 영화는 한 남성의 잦아드는 울음 소리로 마친다. 아테네 올림픽 결승전에서 패한 직후 임영철 감독의 모습이다. 그는 “어떻게 한 나라를 대표한다는 선수들이 돌아갈 팀이 없느냐. 우리 선수들이 훈련할 때….”라고 말하다 울음을 터뜨렸다. 그가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을 비추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줄임말로 ‘우생순’이라 불린다. 그런데 ‘우생순’은 어쩐지 한 평범한 여성의 심심한 이름처럼 들리기도 한다. 임영철 감독은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그 우생순 들과 피와 땀을 함께 적셨으리라. 여성의 삶에 대해 고뇌하며 눅눅한 밤을 지샜으리라. 그의 울음이 우리 주변의 수많은 우생순을 가슴으로 이해하게 된 남성의 울음처럼 들리는 건 그래서다. 하여 영화는 여성의 일상을 묵묵히 견뎌내고 있는 이 땅의 우생순 들에게 말을 건다. 그러면서 남성들에게 그들을 주목하라고 주문한다. 남편 빚에 시달리는 ‘우생순’을, 비정규직에 목을 매달고 생계를 잇고 있는 '우생순'을, 소외된 곳에서 소외된 일상을 견디는 무수한 ‘우생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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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라는 이름은 예수 이후 인류사의 중량과 맞먹는다. 그가 십자가의 수난을 겪은 것은 그의 나이 33세 되던 해, 그러니까 서기 33년의 일이고, 조지 부시가 예수의 이름을 부르대며 이라크로 진격한 것은 서기 2003년이다. 인류는 예수를 둘러싼 수많은 전쟁을 치뤄내며 예수 없는 이천 년을 살아왔다. 영광의 부활을 맞이하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예수는 그 이천 년 동안, 제 이름을 둘러싼 싸움박질을 그저 관망하고 있다.

인간 영혼의 해방을 역설했다는 예수는 오늘 어디에 있는가. 그가 아버지라 부르는 하나님은 또 어디에 있는가. 유대의 족장사는 아브라함의 장자인 이스마엘에게서 아랍 민족이, 늦둥이 아들인 이삭에게서 이스라엘 민족이 뻗어 나왔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의 세계는 한 아비에게서 난 두 아들이 같은 신을 섬기면서 서로 싸우고 있는 형국인 셈이다. 하나는 야훼의 이름으로. 다른 하나는 알라의 이름으로. 이런 증오와 절망으로 가득한 세계를 두고 모든 사랑의 절대치인 예수가, 그 아비인 하나님이 왜 개입하지 않는가. 그들은 대체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단 말인가.

애석하게도 기독교인인 나는 그 답을 모른다. 아니, 알지만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 ‘안다고 믿는 것’이다. 교회 학교가 내 두뇌 깊숙이 기입해둔 성경과 교리에 관한 지식들은 그에 대한 모범 답안을 마련해두고 있지만, 나는 그것들이 인간의 이성과 불화할 것을 안다. 어떤 이성적 논리로도 설명될 수 없는 것. 우리는 그것을 일러 ‘신앙’이라 부른다. 치밀한 논리로 논증되지 않는 지식은 ‘과학’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다. 때문에 신앙은 과학적 논증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내 평소의 생각이다. 그러나 내 안에 잔존하는 한줌의 신앙을 거두어 내고서, 내가 가진 이성으로 예수와 기독교를 둘러싼 담론들을 가능한 과학적으로 접근해 보는 것은 ‘신앙’을 위해서도 유익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기독교 내부의 모순을 가장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까발리는 유일한 방식이기도 하다.

정통 신앙을 계승했다는 이른바 정통 기독교인들은 대개 그들의 신앙-진리의 담지자라 여겨지는 기독교-교회 집단의 내부 모순을 열정적으로 모르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무지에의 열정’은 교회-권력에 의한 지배 효과라 불릴 만하다. 스스로를 진리라 참칭하는 교회-권력은 내부 모순에 도전하는 일련의 움직임에 대해 ‘이단’이라는 딱지를 붙여가며 ‘무지에의 열정’을 강요해 온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때문에 기독교인 일반은 이단의 딱지를 붙이고서 교회-권력으로부터 제거될 것을 두려워하여 기꺼이 복종을 자청하고 나서는 것이다. 그들의 신앙의 근거인 예수 정신을 왜곡하는 일련의 모순들을 열정적으로 모르고자 하면서 말이다.

일레인 페이젤의 <성서 밖의 예수>(정신세계사: 1989년)는 그 같은 정통파 기독교인들의 ‘무지에의 열정’에 일격을 가할 훌륭한 저술이다. 페이젤은 그를 위해 오늘날 정통 기독교의 성서와 교리의 ‘절대 진리성’을 의문에 부친다. 그는 1600년 만에 빛을 본 비밀 복음서 이야기를 풀어내며 해답에의 노정을 시작한다. 1945년 12월, 이집트 남부 ‘나그 함마디’에서 고고학적으로 놀라운 문서가 발견된다. 오늘날 ‘나그 함마디(Nag Hammadi) 텍스트’라 불리는 고서 꾸러미다. 그 꾸러미에는 정통 기독교의 교리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전혀 다른 성서가 남아 있었다. 정통 기독교의 성서에선 볼 수 없는 <도마 복음서>, <빌립 복음서>, <야고보 비밀서>, <베드로가 빌립에서 보내는 서한>,<베드로 묵시록>, <애굽인 복음서>, <진리 복음서>, <마리아 복음서>등의 이름이 붙어 있었는데, 훗날 성서 고고학자들에 의해 그 텍스트들이 정통파 기독교인들에 의해 제거된 영지주의 기독교인들의 성서였음이 밝혀진다.

페이젤이 전하는 영지 복음서의 몇몇 구절들은 과연 놀랄 만 한 것들이다. 이를테면, <도마 복음서>에는 다음과 같은 예수의 말이 나온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네 안에 있는 것을 낳으면, 네가 낳은 것이 너를 구할 것이다. 네가 네 안에 있는 것을 낳지 못하면, 네가 낳지 못한 것이 너를 파멸시킬 것이다.” 이 구절에서 발견되는 예수는 선(禪)을 설파하는 불자의 모습이다. 이뿐 아니다. 영지 복음서엔 이른바 정통 기독교를 대놓고 부정하는 것들로 가득하다. 영적 깨달음을 부활의 메세지라 믿었던 영지주의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제자였던 도마를 예수의 쌍둥이 형제라 전하는가 하면, 동정녀 탄생을 영적 부활의 상징적인 의미로 읽어낸다. 그들은 육체의 부활을 믿는 정통 기독교인들을 순진한 의식의 소유자라 비판한다. 영지주의 기독교인들에게 예수의 부활 사건은 ‘영혼의 부활을 통해 누구나 예수의 반열에, 즉 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상징적 메세지였던 것이다.

페이젤이 들려주는 낯선 이야기는 분명 충격적이다. 책을 읽으면서 수 없이 많은 도리질을 쳤다. 혼란스러웠고 얼마간은 두려웠다. 만일 페이젤이 전하는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영지주의 복음서의 이야기들이 진리의 일단이라도 지니고 있다면, 내가 알고 신앙으로 받아들인다는 기독교는 의심받아 마땅한 것이 아닐까. 하기야 정통파 기독교인들이 베드로를 이어 사제를 제도화하고 그로써 절대무이의 진리의 담지자로 스스로를 신격화했다는 사실. 그리고 기독교 공인 이후, 권자적 지위를 보다 공고히 하기 위해 존재하던 수많은 기독교의 분파를 폭력으로 제압했다는 역사-정치적 맥락은 충분히 수긍할 만한 것들이다. 영지주의 기독교인들이 그 일부였음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영지주의 복음서가 전하는 그들만의 교리가 진리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모든 것을 상징으로 읽어내는 그들의 해석은 정통 기독교의 그것보다도 낡은 것이어서 내 마음의 줄을 퉁기지 못한다. 결국 정통 기독교인의 신앙이든, 영지주의 기독교인의 신앙이든 그것이 과학의 외부에 위치함은 매 한가지다. 그 말은 어느 것도 과학적 검증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뜻한다. 때문에 책을 마무리 지으면서, 나는 내 신앙의 동심원과 보다 많은 부분을 공유하는 정통 기독교의 복음서가 여전히 영지주의의 그것보다 울림의 폭이 큰 것임을 다시 한번 새긴다. 이 세계의 육체의 고통과는 동떨어진 곳에서 저 혼자 웅얼대는 <도마 복음서>의 예수는, 세계 한 가운데 꼿꼿이 서서 세상을 갈아엎는 <마가복음>의 예수에 비해 얼마나 빈약한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영지주의 복음서의 역사적-정치적 맥락이 집단화되고 권력화된 기독교-교회에 던지는 의미를 긍정한다. 그들의 ‘소멸의 역사’는 정통 기독교의 ‘타락의 역사’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정통 기독교가 예수 정신으로부터 한없이 멀어지면서 스스로를 진리화, 권력화하던 틈바구니에서 그들이 사라져 갔던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든 살아남았다면, 예수에 대한, 기독교에 대한 논의의 폭이 어떤 식으로든 보다 넓어졌을 것임은 자명하다. 이른바 교회-폭력이 효과적으로 뿌리 내리지만 않았었더라면 오늘의 기독교-교회의 형태는 사뭇 달랐을 것이다.

교회-폭력은 영지주의 기독교인들의 평등한 교회 연합체를 폭력으로 제거했다. 일찍이 흑인에게 영혼이 없다고 공언했던 중세의 한 주교는 노예 제도를 합법화하는데 빌어먹을 교회-폭력을 사용하기도 했었다. 그러니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스스로를 진리의 담지자라 믿는 집단의 폭력이다. 하여, 오늘 예수 정신의 올바른 구현을 위해서는 ‘언제나-이미-참’이라 주장되는 기독교-교회 집단의 존재 양식과 교리를 끊임없이 의문에 부쳐야할 것이다. ‘성서 밖의 예수’가 필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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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 김광규

4ㆍ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는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발짝 깊숙히 늪으로 발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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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을 두려워하지도,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지도, 무엇보다 ‘살기 위해 살지’ 말자. 김광규의 노래를 따라 부를 때마다 끝없이 울리는 소리: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때묻지 않은 고민만 하며 살 순 없을까. 정말 안 되는 걸까.

-2008년 1월. 인수위 브리핑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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