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월. 회사 동기들과 베트남을 다녀왔다. 입사를 코 앞에 두고 있던 때였다. 베트남의 푸석푸석한 술집에서 인간에 대해, 언론에 대해, 기자의 꿈에 대해 떠들던 기억이 난다. 몇번의 다툼도 있었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다들 열의가 들끓던 때였다. 그러니 부딪힘은 다반사였다. 구겨진 인상은 금세 낄낄대는 낯빛으로 바뀌곤 했다. 어줍잖게 배운 베트남 말로 ‘머~이(건배)’라고 외치면 그걸로 충분했다. 우리는 때로 심각했고, 자주 웃었다.

‘기자’라 박힌 명함을 받아들 생각에 부풀어있던 그 때. 내 기자관(觀)은 이랬다. 기자란 세상의 미추(美醜)를 분별하는 사람이고, 그 분별의 기초는 결국 ‘인간 사랑’이라는 것. 세상을 증오하므로 사람을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므로 세상을 고발하는 것이 곧 기자의 업이라는 것. 그래서 취재를 하든 기사를 쓰든 그 중심에 ‘인간 사랑’을 세우리라 다짐했다.

시간이 차곡차곡 포개져 나는 어느덧 입사 5년차 기자가 됐다. 나는 요사이 2004년 초의 베트남을 추억하며 아찔해한다. 그때의 마음으로, 뜨겁던 열정으로, 그렇게 촉촉하게 인간을 바라볼 수 있을까. 기자질의 햇수가 늘어갈수록 조금씩 자신감을 잃어간다. 스스로의 생각을 송송 뿌려 짓겠다던 기사는 종종 색채 없는 밋밋함으로로 낯 뜨거운 지면에 얼굴을 내민다. 쏟아지는 뉴스 속에서 내 관점을 곧추 세우지 못해 비틀거리는 기사는 또 어떠한가. 데스킹의 난삽함과 정치성에도 스스로가 조금씩 무뎌지고 있는 건 아닐까 덜컥 겁이 날 때가 많다.

오늘도 저녁을 하며 폭탄주를 서너잔 비워냈다. 선배들은 정치를 이야기했고, 내일 기사를 걱정했다. 나는 왕왕대는 언어의 해방구에 끼여 맥주병 아래를 응시하고 있었다. 술병 아래 두꺼운 부분. 그 진한 어두움이 낯설어 한참을 바라봤다. 저토록 깜깜할 수가 있을까. 술병 밑바닥의 그 짙은 어두움이 곧 기자로서의 내 처지가 아닐까 싶었다. 인간이 인간을 삼켜내는 권력 투쟁의 현장에서 인간을 향한 촉촉한 시선을 고집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자주 패배하고 종종 절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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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초. 아직은 내 눈망울이 제법 촉촉했던 시절, 베트남에서 갓 돌아와서 썼던 글. 서툴지만 꽉 짜면 눈물 몇 방울쯤 나올 정도의 절절함은 있었던 글 같다. 아래에 옮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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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짝이 양말: 통일 베트남의 엇갈린 풍경들

하노이의 새벽은 소리로 가득 찬다. 오토바이 경적 소리에 왁자한 베트남인들의 소리가 포개져 소란한 새벽이다. 호치민(胡志明) 묘를 찾아 나선 길. 그 소란함 속에서 바쁘게 하루를 여는 사람들을 만난다. 하나 같이 밝은 표정들이다. 우리를 태운 택시 기사는 연신 미소를 지으며 오토바이 물결을 헤쳐 나간다. ‘쌍숭 쌍숭-’하는 뜻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며.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으니 ‘한국말’이라고 답한다. 제 귀에 그렇게 들린다는 뜻이다. 한바탕의 웃음이 택시 안을 메운다. ‘쌍숭 쌍숭-’. 옛 식민지의 자식들은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소통’한다.

하노이. 채 30년이 못 되는 통일 베트남의 수도다. 그만큼 활기차고 변화의 폭이 크다. 변화는 곳곳에서 감지된다. 불과 3년 새 고층빌딩이 도심을 메우기 시작했다. 버스터미널 같던 공항도 새 단장을 했다. 지난 해 말엔 ‘동남아시안 게임(Sea Games)’을 개최했다. 도이모이 이후 호치민시에서 발화된 자본주의의 불길이 하노이로 옮겨 붙는 형국이다.

자본주의의 불길이 치솟는 곳에 호치민 능묘가 위치해 있다는 사실은 일종의 역설이다. 통일 베트남의 아버지. 공산주의를 통해 민족해방에 이르는 길을 모색 했던 혁명가. 베트남인들에게 ‘호 아저씨‘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그가 오늘 하노이의 풍경을 본다면? 한쪽에는 호화와 사치 다른 한쪽엔 빈곤과 절망이 뒤섞인 그 어긋난 풍경들을 본다면? 아마도 그는 통탄하지 않았을까. 일생을 폐타이어로 만든 신발을 신고 다니며 민족의 번영과 공생을 위해 헌신했다는 그 아닌가. 공생이 빠져버린 번영 앞에서 그는 무어라 답했을까.

호치민 묘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며 낯선 이방인은 상념에 젖는다. 길게 늘어선 줄에 점점이 박혀 있는 흰 점들이 보인다. 불어나 영어를 사용하는 백인들이다. 그들 곁엔 불어로, 영어로 호치민의 삶을 설명하는 베트남 가이드가 있다. 어제 식민 지배에 맞서 싸웠던 베트남인들은 오늘 백인들의 언어로 혁명을 설명하는 일로 일용할 자본을 구한다. 여행 가이드는 베트남 청년들이 선호하는 직업 중에서도 수위를 다툰다. 지독한 역사의 아이러니다.

제법 오랜 시간을 기다려 호치민 묘 앞에 이른다. 숨 막히는 정적이 흐른다. 곳곳에 방문객들의 복장을 단속하는 경비병이 서있다. 경직된 얼굴로 방문객들의 반바지와 모자를 단속한다. 반바지는 가리고 모자는 벗어야 한다. 국부(國父) 앞에 예의를 갖추라는 뜻이다. 지갑을 제외한 모든 소지품은 별도로 설치된 보관소에 맡겨야 한다. 프랑스인이건 미국인이건 한국인이건 예외는 없다. 호치민에 대한 베트남인들의 특별한 자긍심과 자존심이다.

모자를 벗고 조용히 발을 옮겨 분묘 내부로 들어간다. 방부 처리된 호치민이 생전 모습 그대로 누워 있다. 다소 지친 모습이다. 죽어서 한 줌의 재가 되길 원했던 그다. 일생을 재와 같은 삶을 살았던 탓이다. 그래서 ‘호 아저씨’라는 별칭이 붙었다. 그러나 검약한 한 혁명가는 오늘 잘 빚은 돌무덤 아래 갇혀 있다. 한 점의 전시품처럼-. 무덤 안에서 삶과 죽음은 하나인 듯 뒤엉켰다. 산 자들이 줄지어 죽어도 죽지 않은 자를 지나갔다. 베트남인들에게 호치민은 영원히 살아 있어야 할 자존심이다. 그가 죽어서 더욱 피곤해 보인다는 동기들의 일성이 들려온다.

떠이 호수로 향하는 길. 식민 모국 프랑스의 흔적이 하노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관공서에서 카페에 이르기까지 프랑스는 떠나지 않은 제국으로서 건재하는 듯 보였다.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크다는 떠이 호수를 바라보다 허기를 느끼고 식당을 찾는다. 프랑스풍으로 꾸며진 식당이다. 역한 향신료 냄새가 진동하는 베트남 전통 음식으로 허기를 달랜다. 식당 앞에는 구걸하는 아이가 있다. 여느 관광지에서나 볼 수 있는 익숙한 풍경이다. 낯선 이방인을 발견한 아이는‘1달러 1달러’를 외치며 팔을 붙잡는다. 익숙해진 이방인은 ‘노’라며 손을 젓는다. 식당 안에선 벤츠, BMW 등 고급차가 나가기를 기다리며 경적을 울린다.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의 창건자 호치민이 죽어도 죽지 않은 모습으로 묻힌 하노이의 엇갈린 풍경이다.

현지 베트남 관료들은 본국의 사회주의 혁명이 여전히 진행 중이라 말한다. ‘급진’이란 말 대신 ‘점진’을 택했을 뿐-. 베트남 공산당은 당의 경제 지침을‘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시장 경제’라 선언한 바 있다. 그 궁극적 지향점은 인간 해방. 민족적 차원에서 나라의 독립, 인간적 차원에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를 해소해 개인이 해방에 이르게 한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통일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서 그들의 이념이 구체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진단을 내리기란 힘들다. 시클로를 위협하는 벤츠와 구걸 하는 아이를 내모는 BMW가 뒤엉켜 달리는 하노이에서 ‘호 아저씨’의 사회주의는 이념의 깃발로서만 유효해 보였다.

자본주의의 불길이 타오르는 통일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 그곳을 가득 메운 장관의 오토바이 행렬은 성장하는 자본주의의 상징처럼 보인다. 그곳에서 가장 당혹스런 풍경은 펄럭이는 붉은 깃발들과 낫과 망치를 그려 놓은 입간판들. 그리고 그 아래를 어슬렁대는 구걸하는 아이들과 고급 승용차의 기막힌 대비다. 베트남에서 혁명은, 그 이념은 이제 훌륭한 상품으로서만 존재하는 모양이다. 국부 호치민이 베트남인들의 자존심의 일부로서만 유효하듯이-. 호의 사상은 그의 주검과 함께 방부 처리돼 밀폐됐다.

“ one hour, one dollar!!“ 구걸하는 아이가 물러난 자리를 시클로 호객꾼들이 메운다. 성가신 호객꾼들을 피하는 최선의 방법은 무대응. 며칠간의 베트남 여행 중 터득한 진리다. 무대응으로 일관하는 우리에게 호객꾼이 건네는 말이 흥미롭다. “호치민, 호치민!!” 자신의 말을 못 알아듣는다고 판단한 호객꾼이 궁여지책으로 건넨 말이다. ‘호치민’이란 말엔 대개의 관광객들이 반응하리라는 그들 나름의 생각에서일 테다. 국부 호치민마저 호객의 수단으로 등장하고 있는 셈이다. 

쌀쌀한 날씨 탓인지 하노이의 시클로꾼들 가운데는 양말을 신은 이들이 적지 않다. 베트남의 다른 도시의 경우 대개 맨발의 슬리퍼 차림임을 떠올려 보면 독특한 광경이다. 재밌는 것은 시클로꾼들이 대개 짝짝이 양말을 신고 있다는 사실. 양말을 아무렇게나 챙겨 신은 것은 그들의 곤궁한 삶 탓이겠으나, ‘짝짝이 양말’은 오늘 베트남을 드러내는 메타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 쪽에는 낫과 망치가 그려진 붉은 양말을, 다른 한 쪽엔 달러가 그려진 푸른 양말을-.

베트남 혁명 박물관으로 가는 택시 안. 시클로꾼의 닳아빠진 짝짝이 양말에서 출발한 상념은 다음과 같은 물음에 가 닿는다. 베트남이 ’짝짝이 양말’을 언제까지나 고집할 수 있을까. 오늘 베트남을 삼키고 있는 자본주의의 속도를 볼 때 대답은 회의적이다. 통일 베트남의 사회주의는 작동하지 않는, 공허한 이념이지만 도이모이 이후 스며든 자본주의는 현실에서 작동하는 강력한 이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베트남인들에게 사회주의는 지난 날 삶을 바닥까지 끌어 당겼던 고달픈 기억의 전부다. 베트남이 짝짝이 양말을 벗고 푸른 빛 새 양말로 고쳐 신을 날이 머지않아 올 것이다. 그날, 하노이의 ‘호 아저씨‘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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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은 동물의 보편적인 생명 활동이다. 눈을 뜨기 위해 눈을 감고 사지의 활동을 잠시 멈추는 일은 신의 시혜이고, 자연의 섭리이다. 잠을 통해 동물은 육체의 쉼을 누리고 그로써 생명을 이어간다.

잠을 잘 때 가장 큰 변화를 보이는 신체 기관은 눈이다. 눈을 덮었다 열었다 하는 눈꺼풀은 세계와 자아 사이에 걸친 막이다. 우리는 눈꺼풀을 내림으로써 세계와 단절된다. 그러고 보면, 눈은 잠의 시작과 끝에 깊이 관여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인 셈이다. 눈꺼풀이 내리면 세계가 닫히고, 눈꺼풀이 오르면 세계가 열린다. 眠이 目(눈)을 취해 이루어진 글자인 것도 그런 까닭일 게다.

目(눈)에 民(백성)을 더하면 眠(잠)이 된다. 여기서 目은 뜻에 해당할 것이고, 民은 음에 해당될 터이다. 그래서 眠은 형성문자라 분류하는 편이 자연스럽다. 뜻과 음이 만나 형성된 글자라는 말이다. 그런데 글자의 모양새를 가만히 보면, 반드시 그렇게만 볼 것도 아니다. 目은 흡사 베개의 모양을 본뜬 듯해서, 사람(民)이 베개를 베고 누운 모습 같다. 그래서 眠을 상형문자라 우길 수도 있을 터이다. 어차피 그 기원을 정확히 밝힐 수 없는 바에야, 한 글자의 뿌리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도 생각할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혹 상형문자라면, 目 옆으로 人이 아니라 民을 둔 것은 왜일까. 人이 보다 개별적인 사람을 뜻한다면, 民은 무리지은 사람들, 즉 보편적인 사람들을 지칭한다. 따라서 目과 民의 만남은, 사람이면 누구나 잠을 자고, 또 그래야만 사람이 사람일 수 있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닐까.

그러므로 不眠은 사람의 생명 현상에 역행하는 것이다. 일순간에 모든 것을 멈춰 세우는 것만큼 자연에게 이로운 것은 없다. 사람도 자연의 일부일 터이므로, 하루에 예닐곱 시간 잠시 멈추는 것은 필수적이고, 또한 보편적인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에게 그것은 더 이상 보편적이지 못하다. 不眠에 시달리면서,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이다.

不眠은 물론 생명 현상에 반하는 현상일 테지만, 역으로 가장 생명 현상에 가까운 것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현대인의 不眠이란 살아남지 못할 것에 대한 不安의 소산이고, 따라서 그것은 생명에의 욕망을 가장 강렬한 형태로 표현하는 것일 수도 있다. 살아야 한다는 맹사적 욕망! 거기에는 잠을 죽음의 메타포로 받아들이는 인간의 보편적인 트라우마가 작용하는지도 모른다.

不安에 시달리는 사람은 不眠에 이르고 不眠은 다시 不安을 낳는다. 不安은 不眠과 熟眠을 가르는 실질적 힘이다. 내가 잔다기보다는 不安이 나를 잠들게도 하고, 또한 잠을 교란시키기도 한다. 그래서 不安은 현대인의 생명을 지속적으로 통제하고 위협하는 주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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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 저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02월

종일 내 몸의 모든 구멍이 막힌 듯 답답하다. 그런데도 나는 창문을 닫고서 웅크리고 있다. 어쩐지 문을 열면 내 몸의 막힌 구멍이 일거에 뚫려 육체가 찢길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엄습한다. 방의 불은 끄고 삼파장 스탠드 불만 켜 두었다. 낡아선지 스탠드 불빛이 예전만 못하다. 나는 밤에 책을 읽을 때 꼭 방의 불을 끄고 스탠드 불빛 아래서 보는 습관이 있는데, 그 까닭은 확실치 않다. 왜일까?

요즈음 내가 주로 읽는 책은 이종영의 『욕망에서 연대성으로』(백의, 1998)인데 그의 저작을 죄다 읽어버리고 싶은 욕심이 든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지금껏 읽어 둔 그의 책만이라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책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건 대체 어느 정도를 뜻하는 걸까? 나는 그것을 마치 그가 말하듯 그의 책을 내가 줄줄 꿸 수 있을 정도라고 나름대로 정해 두었다. 그렇게 정하고보니 책을 읽을 때마다 짜증이 밀려온다. 그런 정도까지 책을 읽고 이해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에 대한 이상한 집착이 있다. 병이라면 병이다. 이러다간 한 권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할지 모른다.

방의 불을 끄고 한껏 웅크리고서 집어 든 책은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 읽은 횟수로만 세 번 쯤 되는 내 열독서다. 김현의 책은 그것에 맛을 한번 들이면 도무지 헤어나기 힘든 마약과 같다. 간혹 그의 정신세계가 지나치게 관념적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나는 진실로 그의 문체와 거기에 녹아든 농밀한 사유를 훔치고 싶다. 김현의 생각 하나: 육체는 자기가 고통스러우면 사고를 중단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그 고통에서 먼저 해방되려 한다. 맹목적이 아니라 맹사적이라 할까. 내 생각 하나: 젊은 한 때를 지배했던 이른바 정의로운 ‘이즘(-ism)’의 행렬이, 젊음이 기울어질 무렵 사라지는 일반적 진리는 아마도 이러한 육체의 메커니즘에 근거한 것이 아닐까. 맹사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동물적 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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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통이란 엠마뉘엘 레비나스의 타당한 지적처럼,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것’, ‘참아낼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고통은 우리의 실존을 삼키며 마침내 존재 그 자체가 된다. 시간은 그러한 고통을 제거하는 유일한 것이다. 죽음에 이르는 고통이야 시간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일테지만, 대개의 고통은 시간의 흐름 속에 희석되기 마련이다. 시간의 치유를 감내해 낸 자아는 더 이상 동물학적 의미에서의 기계적이고 자동적인 삶을 살아내지 않는다. 자아의 내부에 깊숙이 스며든 고통이 자동적인 삶에 단 하나의 쉼표를 마련해 두는 것이다. 그 쉬어감의 꼭지에서 우리는 인간적 성찰을 경험하고 유래 없이 확장된 감수성을 발견한다. 고통의 미학. ‘고통’이라는 끔찍한 말에 세상의 아름다움을 논하는 ‘미학’을 덧붙일 수 있는 까닭은 고통이 그와 같은 감수성의 확장을 이끌어내는 탓이다. 고통을 경험한 자아는 그와 동일한 고통을 겪는 타자를 향해 한껏 자아를 열어 놓는 것이다.

2. '버스, 정류장'은 그 ‘고통’과 ‘확장된 감수성’에 관한 영화이다. 아니다, 이 말은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을 말할 뿐, 영화의 전체를 말해주지 못한다. 영화는 오히려 ‘고통’에서 ‘확장된 감수성’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관한 이야기인데, 영화의 제목에 첨가된 ‘쉼표’가 그 모든 성찰을 담고 있다. 언어적 지각 양식에 의해 규정되는 삶을 잠시 멈춰 세우고 나의 고통과 너의 고통이 만나는 자리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영화는 몹시도 아파한다. 고통과 고통이 만나는 그 자리는 몹시 불확정적이기 때문이다. 삶이 대개 그러하듯, 참을 수 없는 고통이 확장된 감수성에 이르는 과정은 어떤 불확정성에 기대고 있다. 영화에서 학원 국어 강사인 재섭에게 학생들이 대뜸 묻는다. “선생님, 엔트로피가 뭐에요?” 불쑥 끼어든 대사는 사실 영화가 말하려는 부분을 가장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엔트로피의 사면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인간이라면, 영화는 담담히 그 엔트로피에 자신을 내맡긴, 말하자면 인간 일반을 거스르는 두 인물을 내세운다. 재섭과 소희. 세상이 언어적으로 규정해 놓은 질서를 거부하며 자아를 유폐시킨 두 인물은 그 상징적 질서로부터 도태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몹시 고통스러워한다. 그리고 마침내 재섭의 고통과 소희의 고통이 만난다. 버스, 정류장에서.

3. '버스, 정류장'을 보는 일은 사실 여러모로 불편했다. 그것이 낯선 내러티브 탓인지, 극도로 절제된 감정과 과감히 생략된 디테일 때문인지 그것은 ‘불확정적’이다. 다만, 재섭과 소희의 고통이 만나는 자리를 조용히 따르다보면, 마침내 다다르게 되는 우리 내부의 고통이 나의 자아를 까발리는 불편함을 이끄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슬쩍 시작했다가 은근히 끝나버리는 영화에서 우리는 인물들의 드라마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구할 수 없다. 무슨 까닭인지는 정확지 않으나 어른의 세계가 요구하는 상징적 질서를 거부하는 재섭과 소희는 서로에게서 자신의 고통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들의 감수성은 고통을 발견하는 순간, 무한 확장되지 않는다. 영화가 어떠한 정점도 생략한 채, 건조한 내러티브로 전개되는 것도 그 같은 까닭이다. 영화는 고통의 자아들이 만나는 자리를 지나칠 정도의 인내심을 가지고 천천히 뒤따르는데, 재섭과 소희가 소통하는 지점에 종국에 관객들을 포섭하기 위한 전략인 듯 싶다. 여느 멜로였다면, 어느새 격정적인 사랑으로 번졌을 재섭과 소희는 절제된 카메라 속에서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하며 일정한 긴장을 유지한다. 마치, 돌아옴과 떠나감을 반복하는 버스와 정류장의 관계처럼 고통과 확장된 감수성 사이에서 그들은 머뭇거린다.

4.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길게 늘어지는 그들의 머뭇거림은 결과적으로 관객들을 그 가운데로 불러들인다. 어쩐지 불편함을 계속해서 감지해야만 하는 관객들은 삶의 보편적 불편함 때문에 그들의 고통의 향유에 기꺼이 동참할 수 있다. 글쓰는 재주를 지닌 재섭이 결코 제도권으로 편입되지 못한다던가, 소희의 원조교제, 친구의 자살 등과 같은 구체적인 삶의 내용은 그리 중요치 않아 보인다. 오히려 감독이 바라는 것은 보편적 의미에서의 고통스런 삶과 삶이 만나는 것이며 그 소통에 관객이 끼어들기를 주문하는 것이다. 고통은 성찰을 부르는 법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고통이 치유되는 가운데 쉬어감의 꼭지가 분명 있다고 했다. 그 쉬어감의 꼭지에서 우리는 우리가 경험한 고통 때문에 타자의 고통을 향해 감수성을 활짝 열 수 있는 것이다. '버스, 정류장'은 영화를 보는 내내 우리의 감수성을 열고자 애쓰는 영화이다. 서두르지 않고 쉬어가듯 이어지는 이야기는 재섭의 고통과 소희의 고통 그리고 관객의 고통이 만나는 장을 만들어낸다. 영화의 말미에 재섭과 소희가 타고서 떠나는 버스를 길게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은 그대로 관객의 시선과 일치한다. 비로소 확장된 감수성으로 서로를 내면으로 받아들인 재섭과 소희. 나는 감독의 시선을 따라, 한참을 그들이 떠나는 뒤를 지켰다. 비로소 그들을 내 감수성이 받아들이고 있음을 감지하면서. 버스, 정류장에서 ‘우리’의 ‘고통’이 만났다.

2002. 03. 14.
K.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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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이 실존의 한 근거라면, 사랑은 욕망의 한 근거이다. 욕망하므로 살아있다라면, 우리는 한편으로 ‘사랑하므로 욕망한다’고 말할 수 있을테다. 자아에 대한 사랑은 실존의 결핍을 보상하기 위한 욕망을 작동시키고, 타자를 ‘향한’ 사랑은 타자‘로부터’의 사랑을 욕망하게 한다. 그것이 사랑-욕망의 메카니즘이다. 다시, 사랑이 욕망의 한 근거라는 말은 모든 사랑이 결국 나르시스적인 것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타자를 향한 사랑이 결국 타자로부터의 사랑으로 귀속됨은 모든 사랑의 밑자리에는 결국 확고한 자아가 자리하고 있음을 뜻한다. 하여, 모든 종류의 사랑은 자기애의 틀 안에 갇힐 수밖에 없다.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그렇다. 아니, 보편적으로는 그런 것이다.

그러나 무릇 위대함이란 보편성을 뛰어넘는 데서 작동한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위대한 사랑이란 위에서 애써 밝힌 실존의 밑자리를 뒤집는 데서 태동한다. 자아의 결핍을 보상받기 위한 사랑, 타자의 사랑을 욕망하는 그러한 사랑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타자의 결핍을 채우고 타자의 존재의 비약을 원조하려는 욕망을 생산하는, 철저하게 이타적인 사랑. 그것은 과연 위대한 사랑임에 틀림없다. 여기, 그러한 위대한 사랑이 있다. 그것은 차라리 악마적으로 위대한 그런 사랑이다. 파멸이 전제가 된 사랑.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 기포처럼 지워지는 사랑. 그래서 더 빛나는 사랑. 세기말 온갖 불순한 욕망이 들끓는 파리의 물랑루즈에서 악마적으로 아름답고 위대한 사랑이 시작된다. 물랑루즈. 이 유쾌하고도 비극적인 영화는 바로 우리의 몽상 속에서나 가능한 ‘영원한 사랑’을 노래하는 발칙한 영화다. 자, 클럽 물랑루즈의 문을 열고 퇴폐와 환락의 공간 속에서 그 꿈의 사랑을 찾아보자.

영화의 서사는 세 가지 욕망의 줄기를 따라 진행된다. 그 하나는 가난한 극작가 크리스티앙의 사틴에의 욕망. 엉뚱하게도 극작가의 길에 들어선 크리스티앙은 19세기 말의 전형적인 보헤미안적 예술혼을 한 여인에의 사랑으로 전화시킨다.요란하고 퇴폐적인 분위기의 물랑루즈 클럽에서 요부 사틴과 마주한 크리스티앙은 마침내 사틴을 사랑하게되고, 그녀‘로부터’의 사랑을 욕망하기에 이른다. 그 둘은 공작의 사틴에의 욕망이다. 이는 크리스티앙의 그것과 다소 그 양상이 다른데, 그것은 공작의 욕망이 타자의 사랑을 갈구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소유하려는 소유욕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대자본가인 공작은 물욕과 크게 다르지 않은 맥락에서 사틴을 소유하려 하며, 그를 위해 집요하게 그녀에게 하룻밤을 요구한다. 욕망의 마지막 줄기는 짐작하듯, 사틴의 욕망이다. 그녀의 욕망은 다소 이중적인 양상을 띠는데, 그것은 그녀의 욕망이 사랑에의 욕망과 자본에의 욕망이 중첩되어 있음으로 인해서이다. 요부 사틴은 그녀가 노래하듯, ‘다이아몬드’만이 여자의 삶을 구원할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히는 한편, 크리스티앙으로부터의 사랑을 욕망하는 야누스적 욕망을 지녔다. 이렇듯, 영화의 서사는 각기 다른 방향에서 뻗어난 세 욕망이 서로 뒤엉킨 양상을 띠고 있다. 크리스티앙의 욕망과 공작의 욕망이 양극이라면, 사틴의 욕망은 그 중간 지점에서 서성댄다.

욕망의 줄기의 뒤엉킴과 풀어냄. 영화 물랑루즈의 서사를 거칠게 이르자면, 흡사 퇴폐적 욕망이 마구 뒤섞인 물랑루즈의 공간적 이미지와도 같이, 엉겨붙은 세 욕망이 제 모양을 갖추어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영화의 밑자리를 차지한 욕망의 줄기는 서사의 흐름 가운데 점점 그 뒤엉킴을 풀어나간다. 이는 크리스티앙의 욕망과 사틴의 욕망이 만나는 지점에서 공작의 욕망이 주변으로 밀리는 형세라 할 수 있다. 서성대던 사틴은 물욕을 버리고 사랑을 좇는다. 사틴과 크리스티앙의 타자에의 사랑은 타자의 사랑을 갈구하는 타자에의 욕망으로 번지고, 그 욕망의 사생아인 ‘질투’를 앓는다. 공작과의 관계를 유지해야만 하는 사틴에게 강한 질투를 내보이는 크리스티앙의 모습은 그래서 안쓰럽다. 그러나 이들의 사랑이 이러한 종류의 욕망만을 증식한다면 결코 위대하다 할 수 없을테다.

결국, 죽어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사틴은 크리스티앙을 죽이려는 공작의 음모를 알아채고서 크리스티앙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욕망을 포기한다. 크리스티앙으로부터의 사랑을 욕망하기를 마다한 그녀의 사랑이 위대한 이타적 사랑으로 거듭나는 시점이다. 이는 마지막 장면에서 사틴의 사랑을 확인하고 마침내 죽어가는 사틴 앞에서 흐느끼는 크리스티앙과 만난다. 그녀의 마지막 부탁. “나를 위한 글을 써줘요. 그러면 영원히 당신과 함께 할거에요” 일년 후, 크리스티앙은 사틴을 위한 글을 쓴다. 파멸한 사랑이 영원을 그 수식어로 취하기 위해서는 ‘자기애(自己愛)'의 욕망을 넘어서야 한다. 사랑을 갈구할 대상이 사라진 상태에서도 작동하는 사랑은 그래서 위대하다. 이미, 파멸이 전제되었던 크리스티앙과 사틴의 사랑은 그리하여 악마적으로 위대한 영원한 사랑이 된다.

물랑루즈는 비극적으로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오르페우스 신화로부터 서사의 골격을 길어낸 바즈 루어만의 상상력은 유쾌함과 비장함이 뒤섞인 환상의 뮤지컬을 생산해내었다. 영원한 사랑을 ‘몽상’하는 그의 ‘몽상의 영상’에는 ‘환상’을 자아내는 화면과 노래, 춤이 버성김 없이 잘 직조되어 있다. 현실태라 하기에는 큰 용기가 필요한 ‘사랑의 위대함’ 혹은 ‘영원함’ 따위를 이야기하기 위한 루어만의 전략은 모든 장르가 혼합된 뮤지컬로 나타났다. 때문에 가난한 작가 크리스티앙과 창녀 사틴의 악마적으로 위대한 사랑은 환상적 영화 장치와 무리없이 접속한다. 19세기말 파리를 재구성해낸 영상은 종종 꿈의 장면을 연상시키고, 화면 한 구석에 박힌 조르쥬 멜리에스의 달은 결국, 영화의 사랑이 몽상과 환상일 수밖에 없음을 우회하여 성토한다. 그러나, 영화를 뒷받침하는 드라마가 촘촘히 그 리얼리즘의 빈칸을 메우면서 영화는 성길지언정 현실성도 담지한다. 환상과 현실을 오가는 영화는 노래와 대사가 번갈아가면서 머뭇거린다. 춤과 연기가 교차하면서 영화는 종종 관객을 들뜨게도 하고 가라앉게도 한다. 영화의 내부 이야기라할 수 있는 물랑루즈에서 공연되는 ‘극’은 영화의 외부 이야기와 적절히 맞물리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적 현실이 허구인가를 끊임없이 의심하게 한다.

허구를 들여다보던 관객은 그 허구 속에서 또 하나의 허구를 발견하고 당황한다. 영화가 이끌고 있는 영원한 사랑의 몽상-환상은 관객이 당황하는 틈에서 비극적인 감흥을 불러낸다. 유쾌한 상상력이 지배적인 이 뮤지컬 장르 영화에서 우리가 외려 그 엠티비적 영상을 넘어선 감동을 얻어내는 것은 역설이 아니다. 영화가 관객을 맘껏 쥐고 놓을 수 있는 힘을 획득한 이상, 우리의 미학적 경험은 전적으로 영화에 의해 가능해진다. 물랑루즈. 이 고답적인 신화적 상상력에 기초한 이야기에 기꺼이 매료될 수 있는 것은 ‘악마적으로 위대한 영원한 사랑’이라는 꿈의 이야기를 몽상-환상의 영상으로 풀면서 허구를 넘나드는 실재적 감동을 놓치지 않는 세심함 때문이다. 나는 ‘세기초’에 등장한 이 유쾌한 ‘세기말’의 사랑 이야기를 절대 지지한다. 영원한 사랑. 그 몽상-환상을 이제 나는 절대적으로 신뢰한다. 죄다 ‘물랑루즈’ 탓이다. 아마도 2001년이 낳은, 아니 21세기가 낳은 가장 위대한 영화 가운데 하나일 이 영화를 보며, 나는 오늘 내 처지를 더 없이 행복한 것으로 여겼다. 그리고 마침내 다음과 같이 내뱉었다. 꿈을 살아가는 나는 행복하다, 라고. 영화를 열고 닫는 지점에서 나래이터가 말한다. ‘마법에 걸린 소년이 있었다.’ 그럼, 그 마법에 걸린 소년이란 혹시 나일지도. 혹은 ‘영원한 사랑’을 신뢰하는 이 글을 읽는 당신일지도.

2001.12.26
K.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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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혼

외로움이
그리움이
삶의 곤궁함이 폭포처럼 쏟아지던
작은 옥탑방에서도
그대를 생각하면
까맣던 밤하늘에 별이 뜨고,
내 마음은 이마에 꽃잎을 인
강물처럼 출렁거렸습니다.

늦은 계절에 나온 잠자리처럼,
청춘은 하루하루 찬란하게 허물어지고,
빈 자루로 거리를 떠돌던
내 영혼 하나 세워둘 곳 없던 도시에,
가난한 시인의 옆자리에
기어이 짙푸른 느티나무가 되었던 당신.

걸음마다 질척이던
가난과 슬픔을 뒤적여,
밤톨같은 희망을 일궈주었던 당신.
슬픔과 궁핍과 열정과 꿈을
눈물로 버무려 당신은 오지 않은
내일의 행복을 그렸지요.

그림은 누추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눈이 시렸을 뿐!
수 많은 기억들이 봄날의 벗꽃처럼
흩날려버릴 먼 훗날,
어려웠던 시간, 나의 눈물이
그대에게 별빛이 되고 나로 인해
흘려야했던 그대의 눈물이,
누군가에게 다시 별빛이 될 것입니다.

가을을 감동으로 몰고가는
단풍의 붉은 마음과 헛됨을 경계하는
은행의 노란 마음를 모아,
내 눈빛이 사랑이라는 한마디 말도 없이,
그대의 마음 속으로 숨어버린 그 날 이후,
내 모든 소망이었던 그 한마디를 씁니다,

저와 결혼해주시겠습니까!

푸른 하늘에 구름을 끌어와,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그대의
사랑에 대하여 쓰며 천사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날들입니다.

===========================
조기영 시인이 아내 고민정 아나운서에게 낭독했다는 시.
환멸을 견디기 힘든 날들이 이어질수록 걸쭉한 사람 냄새는 심란한 가슴 한 구석을 마구 간지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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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란 국호는 어색하다. ‘민주주의’란 말 때문이다. 북한 정권 수립자들의 야심찬 ‘민주기지론’에도 불구하고 이 체제가 민주주의에 가까웠던 적은 없다. 오히려 이 숨막히는 체제는 냉전 시대를 관통하며 남한의 지배 세력-곧 반민주세력-을 공고히 하는 데 손을 뻗었다. '반공'이니 '북괴'니 하는 프로파간다에 적절히 이용된 것이다. 주체 사상이란 요상한 이론으로 민족민주 세력을 파고들면서 남측의 정당한 민주화 운동에 어깃장을 놓은 것도 북한 체제의 작품이다.

더욱 아연한 것은 환갑을 바라보는 북한 체제의 오늘이다. 경제 사정이 최악이라는 풍문은 아득한 레파토리다. 보다 심각한 것은 민주주의 정신을 대놓고 부정하는 기형적인 정치 체제다. 오늘 북한은 김정일 정권의 왕국이자 봉건 체제이며, 흘러간 전체주의 국가의 전형이다. 인간의 내밀한 개인성을 깡그리 무시하는 정치 체제를 민주주의라 부를 순 없을 테다.

개인성을 질식시키는 이 체제가 남한의 민주 세력에 의해 옹호받아 온 것은 기이한 일이다. 사실 지금껏 진보 진영에서 북한 체제 비판은 촌스런 반민주 행위처럼 여겨져 왔다. 근거는 ‘내재적 접근방법’이란 온정주의다. 북한 정권을 특수한 역사적 배경과 객관적인 국제 질서를 바탕에 깔고 이해하자는 주장이다.

언뜻 그럴듯해 보이는 이 ‘따스한 이론’은 역설적으로 가장 포악한 정권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돼 왔다. 민족민주 전선에 살을 맞대고 있던 남측의 진보 세력은 이 이론을 핑계 삼아 북한의 반민주적 정치 체제와 북한 인민 일반을 구별짓는 노동을 게을리 했던 것이다. “북한을 이해하고 돕자”는 도덕적으로 정당한 주장은 그러나 반인권적인 김정일 정권을 유지케 한 비도덕적 결과를 낳았다.

북한의 핵 실험으로 국제 정세가 뒤숭숭하다. 진보 진영은 “모든 게 미국 탓”이라는 안전한 주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이 주장에 일리가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 지독히 너그러웠던 이들이 미국에만 화살을 돌리는 건 온당치 못하다. 그들의 무책임하고 위선적인 대북 온정주의가 북한 인민들을 핵 폭풍 속으로 밀어 넣는데 일정하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도대체가 한 개인의 인간성을 껌 버리듯 하는 정치 체제에 대해 제대로된 비판 한번 하지 못하는 까닭을 나는 알 수 없다. 박정희 유신 체제에 거품을 무는 사람들이 북한식 전체주의에 대해 입을 다무는 이유는 무엇일까. 북한을 따스하게 바라보는 어떤 이들도 지금의 북한 체제에 정착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테다. 그것이 북한 체제를 바라보는 솔직한 자세다.

북한 정권에서 북한 민중들을 떼어놓을 때 비로소 제대로 된 대북 정책이 작동한다. 북한 정권을 자극할 수 있다는  ‘친절한’ 우려 때문에 오늘도 북한의 인권은 쓰레기 더미에 파묻히고 있다. 애초 의도야 어떻든 포용 정책은 남측의 한 자본가와 최고 권력자가 손잡은 결과 탄생했다. 그들은 각기 다른 계산에 따라 북한 인권을 모른 척 해온 ‘온정주의’로 일관했다.  

그 따스한 정책에 대해 오늘의 위기를 전부 책임져야 한다고 말하고 싶진 않다. 다만 그 정책이 북한 정권과 인권의 경계를 철저히 뭉개왔다는 것만은 지적하기로 하자. 북핵 위기란 것도 실은 ‘집단적 디스토피아’를 유지하고픈 북한 정권의 작품이란 것도 분명히 하자. 북한 인권을 말하지 않고 핵 문제를 풀 순 없다. 개인성을 짓누르는 정치 체제를 뒤집지 않고선 '조선'에 ‘민주주의’란 말을 함부로 붙여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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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보단 오늘이, 오늘보단 어제가 좋다. 지난 날을 말할 때 눈물이 고이는 버릇이 있다. 추억은 덮어놓고 슬프고 아름답다는 게 내 생각이다. “예전에 말이야…”로 시작하는 말은 내겐 눈물을 부르는 주문과도 같다. 주름 하나 없던 젊은 시절의 부모님 사진이나 코가 흥건히 묻은 채 해맑게 웃는 형제를 추억할 때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은 그래서다. 추억이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날들에 대한 증언이므로 아름답고, 아름다워서 눈물이 나는 것이다.

<라디오 스타>는 그 ‘슬픈 추억’에 대한 영화다. 낡은 스타가 이야기의 주인공인 것부터가 그렇다. 영화는 늘어진 레코드판처럼 느릿느릿 흘러가지만 감동의 크기는 어지간하다. 우선 영화의 무대부터가 도드라진다. 강원도 영월군이 영화의 배경이다. 강원도는 색다른 시계를 차고 있는 지역이다. 그래서 시대의 흐름을 부러 거스르는 곳이다. 그곳엔 낡은 다방이 있고, 삐걱이는 의자로 가득찬 교실이 있다. 추억을 이야기하기엔 둘도 없는 공간인 것이다.

영화에서 라디오는 공동체를 회복하는 매체로 그려진다. 최곤의 라디오에서 발사된 신호는 나른한 시골 마을을 휘저으며 인간은 여전히 찬란한 존재임을 증명해 보인다. 최곤이 진행하는 음악 프로그램은 밀린 외상 값을 받아내고, 할머니들의 화투 놀이에 조언을 하기도 한다. 집 나간 아버지가 돌아오고, 가출한 다방 종업원의 속 깊은 사연을 전한 것도 라디오다. 라디오는 숙기 없는 꽃집 청년의 사랑을 가장 풋풋한 방식으로 맺어주기도 한다. 여기에다 ‘왕년의 스타’ 최곤을 무작정 좇아다니는 영월의 록밴드는 울림이 큰 라디오 음악으로 공동체를 하나로 엮어낸다. 

이 강력한 마술은 어디서 비롯됐을까. 이 물음에 라디오가 보다 인간에 가까운 매체이기 때문이라는 대답은 비교적 안전하다. 요란한 영상 언어가 난무하는 시대에 잔잔한 소리 언어는 그 자체로 화사한 것이다. 눈을 감은 언어는 골방의 기도처럼 인간 심연의 가장 민감한 부위를 마구 건드린다.

당겨 말하자면, 이 영화를 촘촘히 바느질하는 캐릭터는 모두 라디오형 인간이다. 최곤이 마이크를 삼킬 듯 울먹이며 매니저 박민수를 찾을 때, 그는 자신이 집착해 온 스타-외장을 치장하는-의 가면을 벗어버린 ‘소리’로서 오롯하다. 관객들은 비 오는 날 방송국 건물 앞에서 쭈그리고 담배를 피우는 박민수에게서 쓸쓸한 중년의 사연을 ‘듣는다’. 경쟁이 일상화된 공간에서 이 같은 라디오형 인간은 늘 패배하기 마련이다. 시대를 앞질러 가기보다 스스로 뒤처지기를 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 어깨를 걸치고 라디오처럼 느릿느릿 흘러가는 인간의 삶을 패배라 불러도 무방한 것일까. 보이는 것이 존재를 규정하는 세상에서 인간 본연의 따스함에 주목하는 소리는 정말 묻혀도 좋은 걸까.

오늘날은 종종  ‘냉각의 시대’다. 돈이 인간성을 삼키는 시대에 존재의 따스함은 시나브로 돈의 차가운 금속성에 식어간다는 게 내 생각이다. 작심한 듯 흥행 문법과 결별한 이 영화가 돋보이는 것은 그래서다. 날씬한 영상 스타일 하나 없이 밀고 간 영화는 인간을 추억함으로써 관객들의 눈물을 끄집어내는 데 성공했다. 인간의 추억은 대개 아름답고, 아름다워서 슬프기 때문이다. 영화 속 라디오는 바로 그 추억의 상징물이다. 인터넷보다는 텔레비전이, 텔레비전보다는 라디오가 인간에 가깝다는 것이 영화가 들려주는 ‘소리’다. 시간과 인간성이 함께 지워져 가는 시대에 우리 모두 추억의 라디오 볼륨을 크게 높여보면 어떨까: 아무래도 내일보단 오늘이, 오늘보단 어제가 인간에 가까운 시간인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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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ㅣ 박진규 지음 ㅣ 2005년 12월

그러니까, 문제는 도발이었다. 소문을 듣고 진즉 사 놓고도 책을 펼치지 못했다. 견고한 소설 문법을 뒤집어 놓은 발칙함이 거슬렸던 게다. 박진규의 <수상한 식모들>은 작심하고 읽어야 하는 책이다. 소설 읽기에 제법 익숙한 독자라면 더욱 그렇다. 문학동네 수상작이란 타이틀만으론 독해 과정을 담보해줄 수 없다.

다시 책을 펼친 건 신혼여행 길에서였다. 소설이 신인 작가의 것이었으므로, 허니문의 동반자로서 마땅하리라 여겼다. 그의 발칙함도 신선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 싶었다. 하긴 신혼여행 아니겠는가. 나를 둘러 싼 모든 것이 완전히 변하는 순간! 그랬다. 생각은 적중했다. 독일로 가는 12시간의 비행 시간 동안 나는 이 소설이 건네는 도발적인 상상력에 흠뻑 취했다.

소설은 단군신화를 해체하며 시작한다. 흔히들 마늘과 쑥만 먹고 인간이 된 곰에만 집중한다. 곰이 단군의 모친이라고 주장하는 ‘신화’의 설레발 때문이다. 그런데 곰과 같이 고행을 하던 중 뛰쳐나온 호랑이는 어떻게 됐을까? 소설은 이 엉뚱한 관심에서 출발했다. 소설에선 이 호랑이는 이후 온갖 짐승을 잡아먹고 지내다 ‘여성’으로 환생했다는 상상력이 흘러 나온다. 이 여성은 ‘호랑 아낙’이라 불렸으며 이후 ‘수상한 식모’가 돼 우리 역사의 곳곳을 주물렀다는 것이다.

소설은 전복적이다. 점잖은 문학 개론을 들먹이자면, 내러티브를 구성할 수 이야기가 감히 소설의 옷을 입고 나온 셈이다. 그런데 잘 읽힌다. 어째서일까. 역설적으로 이야기가 엉성해서다. 누구도 한 적 없는 이야기를 숨가쁘게 쏟아내기 때문이다. 소설이 ‘식모’에 주목했다는 것도 신선하다. 식모는 늘 문화 콘텐츠의 변두리를 서성대는 캐릭터다. 산업화 시절이나 농촌 해체의 한 과정에서 주변 인물로 등장하는 게 전부다. 그런데 소설은 식모가 우리 역사의 격랑기에 직간접적으로 간여해 왔다는 사실을 선포한다. 감히 단군신화를 마음대로 해체한 결과로 말이다.

문학동네 심사위원들의 말을 훔치면, 이 소설은 그럼에도 여전히 엉성한 어휘력과 구성력으로 흠집이 많다. 책을 읽던 중 자꾸만 앞장으로 뒷걸음쳐야 하는 것도 그래서다. 하지만 소설의 발칙한 상상력은 쉽게 보아 넘기기 힘들다. 그 상상력의 뿌리가 현 세계를 주무르는 자본주의 비판에 닿아있어서다. 소설에서 수상한 식모는 부르주아 가정에 들어가 가정을 해체하는 인물로 그려지는데, 여기에 작가적 시선이 묻어난다. 주인공 경호가 100kg이 넘는 거구로 그려지는 것도 비만이 자본주의의 한 상징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신인의 발칙함을 핑계로 우리네 단란한 삶을 옥죄는 자본주의에 일격을 가하는 데까지 가 본 것이다. 그 도발이 속 시원하고, 그 전복이 개운하다. 기존 소설 문법을 조롱하고 까마득한 신화를 뒤집은 결과 자본주의 비판이라는 묵직한 울림을 남긴 것이다. 현실 세계를 매몰차게 전복할 수 있는 건 아무래도 나잇살 덜 먹은 신인 작가들이 낫다. 그런 의미에서 박진규는 젊고 건강한 신인이다.  '사망 선고'에 임박한 우리 문학엔 이미-존재하는- 것을 대놓고 조롱할 수 있는 더 많은 박진규가 필요한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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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개월 전만 하더라도 고건은 맨 앞 자리에 있었다. 그 뒤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 이명박 전 서울 시장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모양새였다. 격차는 꽤 컸다. 그는 부동의 자리를 차지한 듯 보였다. 고건이 유일한 차기 대통령감이란 말이 떠돌던 때였다. 온 세상이 그의 얼굴에 대통령의 이미지를 포개고 있어도 그는 짐짓 모른 채였다.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을 본인만 모르는 듯 차기 출마설에 대해 “정해진 바 없다”고만 했다.

침묵으로 제 가치를 높이려던 고건의 전략은 그러나 실패의 길로 들어선 것 같다. 한 여론 조사에서 3위로 밀려나더니 지지율도 20% 아래로 추락했다. 비로소 여론도 그의 정체를 의심스레 보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그러자 고건에 열혈 구애를 펼치던 민주당은 다급해졌다. 다시 ‘통합신당’ 이야기가 떠돈다.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든 ‘과오’를 범했던 정대철 열린우리당 고문도 맞장구쳤다. 노무현을 제외한 중도 개혁 세력의 대통합이 필요하단다. 포장된 신당 논의는 실은 고건 구하기의 일환일 테다. 고건이 “신당에 관심이 있다”며 청와대 입주자가 되려는 야욕을 슬쩍 내비친 것도 그래서다. 

여론 조사에서 다시 박근혜가 청와대 문에 바짝 다가섰다는 사실도 불편하지만, 나는 고건이 맨 앞자리를 내줬다는 사실에 더 안도하는 편이다. 자신의 정적(政敵)과 불화해 본 기억이 없는 대통령을 떠올리는 일은 생각만으로도 입안이 씁쓸해지기 때문이다. 자연인 고건은 관운을 타고 난 사람이었다. 대통령을 제외한 고위직을 두루 거쳤다. 그러면서 정치적으로 ‘무색 무취’의 원칙을 고수했다. 그는 박정희 정권의 도지사와 청와대 비서관을 지냈고, 전두환 정권의 장관이자 국회의원이었다. 노태우가 임명한 서울 시장인가 하면, 김영삼 정권의 총리였다. 김대중 정권 시절 여당의 초대 민선 서울 시장을 지냈고 노무현 정권의 초대 총리인 것도 그의 직함 중 하나다.

이처럼 그의 타고 난 관운은 ‘풍부한 행정 경험’으로 추켜 세워지기도 한다. 하지만 청와대 입주권은 매우 정치적인 공정을 통해 결정되기 마련이다. 정치적 자산을 바탕으로 자신의 정적과  정치적으로 투쟁하는 가운데 여론이 움직이고 마침내 대통령의 위치에 오를 수 있다. 그가 정치적으로 무색 무취인 것은 관료로서의 자질은 될 지 몰라도 대통령에겐 오히려 위험 요소다. 시민들이 대통령의 '통치 철학'을 가늠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더구나 고건의 ‘무색 무취’ 정치관이 스스로 택한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고건이 탄탄한 관료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결국 그의 굴신(屈身)의 결과다. 그는 최고 권력자가 어떤 통치 철학을 지녔든 정치적으로 무색 무취인 채로 오직 몸을 굽혀 온 이력을 지녔다. 그렇지 않았다면 박정희 정권의 총리였던 그가 다시 김대중 정권이 당선 시킨 서울 시장이자 노무현 정권의 총리가 되긴 어려웠을 테다.

그가 여전히 정치적으로 무색 무취 상태에 머무는 한, 그리고 자신의 무색 무취했던 행보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한 청와대 입주권이 그의 손에 들어가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정치적으로 무색 무취한 상태에서 서로 다른 정파에 굴신해 온 대통령이 국민 앞에 몸을 굽힐 가능성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스스로 수십년의 행정 경험을 무기로 여긴다면, 이전투구의 정치판에서 분명한 색깔로 정적들과 겨뤄야 한다. 그것이 '대통령 후보' 고건이 정치적 명분을 쌓는 첫 걸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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