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월. 회사 동기들과 베트남을 다녀왔다. 입사를 코 앞에 두고 있던 때였다. 베트남의 푸석푸석한 술집에서 인간에 대해, 언론에 대해, 기자의 꿈에 대해 떠들던 기억이 난다. 몇번의 다툼도 있었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다들 열의가 들끓던 때였다. 그러니 부딪힘은 다반사였다. 구겨진 인상은 금세 낄낄대는 낯빛으로 바뀌곤 했다. 어줍잖게 배운 베트남 말로 ‘머~이(건배)’라고 외치면 그걸로 충분했다. 우리는 때로 심각했고, 자주 웃었다.
‘기자’라 박힌 명함을 받아들 생각에 부풀어있던 그 때. 내 기자관(觀)은 이랬다. 기자란 세상의 미추(美醜)를 분별하는 사람이고, 그 분별의 기초는 결국 ‘인간 사랑’이라는 것. 세상을 증오하므로 사람을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므로 세상을 고발하는 것이 곧 기자의 업이라는 것. 그래서 취재를 하든 기사를 쓰든 그 중심에 ‘인간 사랑’을 세우리라 다짐했다.
시간이 차곡차곡 포개져 나는 어느덧 입사 5년차 기자가 됐다. 나는 요사이 2004년 초의 베트남을 추억하며 아찔해한다. 그때의 마음으로, 뜨겁던 열정으로, 그렇게 촉촉하게 인간을 바라볼 수 있을까. 기자질의 햇수가 늘어갈수록 조금씩 자신감을 잃어간다. 스스로의 생각을 송송 뿌려 짓겠다던 기사는 종종 색채 없는 밋밋함으로로 낯 뜨거운 지면에 얼굴을 내민다. 쏟아지는 뉴스 속에서 내 관점을 곧추 세우지 못해 비틀거리는 기사는 또 어떠한가. 데스킹의 난삽함과 정치성에도 스스로가 조금씩 무뎌지고 있는 건 아닐까 덜컥 겁이 날 때가 많다.
오늘도 저녁을 하며 폭탄주를 서너잔 비워냈다. 선배들은 정치를 이야기했고, 내일 기사를 걱정했다. 나는 왕왕대는 언어의 해방구에 끼여 맥주병 아래를 응시하고 있었다. 술병 아래 두꺼운 부분. 그 진한 어두움이 낯설어 한참을 바라봤다. 저토록 깜깜할 수가 있을까. 술병 밑바닥의 그 짙은 어두움이 곧 기자로서의 내 처지가 아닐까 싶었다. 인간이 인간을 삼켜내는 권력 투쟁의 현장에서 인간을 향한 촉촉한 시선을 고집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자주 패배하고 종종 절망한다.
=======================
2004년 초. 아직은 내 눈망울이 제법 촉촉했던 시절, 베트남에서 갓 돌아와서 썼던 글. 서툴지만 꽉 짜면 눈물 몇 방울쯤 나올 정도의 절절함은 있었던 글 같다. 아래에 옮겨둔다.
========================================
짝짝이 양말: 통일 베트남의 엇갈린 풍경들
하노이의 새벽은 소리로 가득 찬다. 오토바이 경적 소리에 왁자한 베트남인들의 소리가 포개져 소란한 새벽이다. 호치민(胡志明) 묘를 찾아 나선 길. 그 소란함 속에서 바쁘게 하루를 여는 사람들을 만난다. 하나 같이 밝은 표정들이다. 우리를 태운 택시 기사는 연신 미소를 지으며 오토바이 물결을 헤쳐 나간다. ‘쌍숭 쌍숭-’하는 뜻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며.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으니 ‘한국말’이라고 답한다. 제 귀에 그렇게 들린다는 뜻이다. 한바탕의 웃음이 택시 안을 메운다. ‘쌍숭 쌍숭-’. 옛 식민지의 자식들은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소통’한다.
하노이. 채 30년이 못 되는 통일 베트남의 수도다. 그만큼 활기차고 변화의 폭이 크다. 변화는 곳곳에서 감지된다. 불과 3년 새 고층빌딩이 도심을 메우기 시작했다. 버스터미널 같던 공항도 새 단장을 했다. 지난 해 말엔 ‘동남아시안 게임(Sea Games)’을 개최했다. 도이모이 이후 호치민시에서 발화된 자본주의의 불길이 하노이로 옮겨 붙는 형국이다.
자본주의의 불길이 치솟는 곳에 호치민 능묘가 위치해 있다는 사실은 일종의 역설이다. 통일 베트남의 아버지. 공산주의를 통해 민족해방에 이르는 길을 모색 했던 혁명가. 베트남인들에게 ‘호 아저씨‘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그가 오늘 하노이의 풍경을 본다면? 한쪽에는 호화와 사치 다른 한쪽엔 빈곤과 절망이 뒤섞인 그 어긋난 풍경들을 본다면? 아마도 그는 통탄하지 않았을까. 일생을 폐타이어로 만든 신발을 신고 다니며 민족의 번영과 공생을 위해 헌신했다는 그 아닌가. 공생이 빠져버린 번영 앞에서 그는 무어라 답했을까.
호치민 묘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며 낯선 이방인은 상념에 젖는다. 길게 늘어선 줄에 점점이 박혀 있는 흰 점들이 보인다. 불어나 영어를 사용하는 백인들이다. 그들 곁엔 불어로, 영어로 호치민의 삶을 설명하는 베트남 가이드가 있다. 어제 식민 지배에 맞서 싸웠던 베트남인들은 오늘 백인들의 언어로 혁명을 설명하는 일로 일용할 자본을 구한다. 여행 가이드는 베트남 청년들이 선호하는 직업 중에서도 수위를 다툰다. 지독한 역사의 아이러니다.
제법 오랜 시간을 기다려 호치민 묘 앞에 이른다. 숨 막히는 정적이 흐른다. 곳곳에 방문객들의 복장을 단속하는 경비병이 서있다. 경직된 얼굴로 방문객들의 반바지와 모자를 단속한다. 반바지는 가리고 모자는 벗어야 한다. 국부(國父) 앞에 예의를 갖추라는 뜻이다. 지갑을 제외한 모든 소지품은 별도로 설치된 보관소에 맡겨야 한다. 프랑스인이건 미국인이건 한국인이건 예외는 없다. 호치민에 대한 베트남인들의 특별한 자긍심과 자존심이다.
모자를 벗고 조용히 발을 옮겨 분묘 내부로 들어간다. 방부 처리된 호치민이 생전 모습 그대로 누워 있다. 다소 지친 모습이다. 죽어서 한 줌의 재가 되길 원했던 그다. 일생을 재와 같은 삶을 살았던 탓이다. 그래서 ‘호 아저씨’라는 별칭이 붙었다. 그러나 검약한 한 혁명가는 오늘 잘 빚은 돌무덤 아래 갇혀 있다. 한 점의 전시품처럼-. 무덤 안에서 삶과 죽음은 하나인 듯 뒤엉켰다. 산 자들이 줄지어 죽어도 죽지 않은 자를 지나갔다. 베트남인들에게 호치민은 영원히 살아 있어야 할 자존심이다. 그가 죽어서 더욱 피곤해 보인다는 동기들의 일성이 들려온다.
떠이 호수로 향하는 길. 식민 모국 프랑스의 흔적이 하노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관공서에서 카페에 이르기까지 프랑스는 떠나지 않은 제국으로서 건재하는 듯 보였다.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크다는 떠이 호수를 바라보다 허기를 느끼고 식당을 찾는다. 프랑스풍으로 꾸며진 식당이다. 역한 향신료 냄새가 진동하는 베트남 전통 음식으로 허기를 달랜다. 식당 앞에는 구걸하는 아이가 있다. 여느 관광지에서나 볼 수 있는 익숙한 풍경이다. 낯선 이방인을 발견한 아이는‘1달러 1달러’를 외치며 팔을 붙잡는다. 익숙해진 이방인은 ‘노’라며 손을 젓는다. 식당 안에선 벤츠, BMW 등 고급차가 나가기를 기다리며 경적을 울린다.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의 창건자 호치민이 죽어도 죽지 않은 모습으로 묻힌 하노이의 엇갈린 풍경이다.
현지 베트남 관료들은 본국의 사회주의 혁명이 여전히 진행 중이라 말한다. ‘급진’이란 말 대신 ‘점진’을 택했을 뿐-. 베트남 공산당은 당의 경제 지침을‘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시장 경제’라 선언한 바 있다. 그 궁극적 지향점은 인간 해방. 민족적 차원에서 나라의 독립, 인간적 차원에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를 해소해 개인이 해방에 이르게 한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통일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서 그들의 이념이 구체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진단을 내리기란 힘들다. 시클로를 위협하는 벤츠와 구걸 하는 아이를 내모는 BMW가 뒤엉켜 달리는 하노이에서 ‘호 아저씨’의 사회주의는 이념의 깃발로서만 유효해 보였다.
자본주의의 불길이 타오르는 통일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 그곳을 가득 메운 장관의 오토바이 행렬은 성장하는 자본주의의 상징처럼 보인다. 그곳에서 가장 당혹스런 풍경은 펄럭이는 붉은 깃발들과 낫과 망치를 그려 놓은 입간판들. 그리고 그 아래를 어슬렁대는 구걸하는 아이들과 고급 승용차의 기막힌 대비다. 베트남에서 혁명은, 그 이념은 이제 훌륭한 상품으로서만 존재하는 모양이다. 국부 호치민이 베트남인들의 자존심의 일부로서만 유효하듯이-. 호의 사상은 그의 주검과 함께 방부 처리돼 밀폐됐다.
“ one hour, one dollar!!“ 구걸하는 아이가 물러난 자리를 시클로 호객꾼들이 메운다. 성가신 호객꾼들을 피하는 최선의 방법은 무대응. 며칠간의 베트남 여행 중 터득한 진리다. 무대응으로 일관하는 우리에게 호객꾼이 건네는 말이 흥미롭다. “호치민, 호치민!!” 자신의 말을 못 알아듣는다고 판단한 호객꾼이 궁여지책으로 건넨 말이다. ‘호치민’이란 말엔 대개의 관광객들이 반응하리라는 그들 나름의 생각에서일 테다. 국부 호치민마저 호객의 수단으로 등장하고 있는 셈이다.
쌀쌀한 날씨 탓인지 하노이의 시클로꾼들 가운데는 양말을 신은 이들이 적지 않다. 베트남의 다른 도시의 경우 대개 맨발의 슬리퍼 차림임을 떠올려 보면 독특한 광경이다. 재밌는 것은 시클로꾼들이 대개 짝짝이 양말을 신고 있다는 사실. 양말을 아무렇게나 챙겨 신은 것은 그들의 곤궁한 삶 탓이겠으나, ‘짝짝이 양말’은 오늘 베트남을 드러내는 메타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 쪽에는 낫과 망치가 그려진 붉은 양말을, 다른 한 쪽엔 달러가 그려진 푸른 양말을-.
베트남 혁명 박물관으로 가는 택시 안. 시클로꾼의 닳아빠진 짝짝이 양말에서 출발한 상념은 다음과 같은 물음에 가 닿는다. 베트남이 ’짝짝이 양말’을 언제까지나 고집할 수 있을까. 오늘 베트남을 삼키고 있는 자본주의의 속도를 볼 때 대답은 회의적이다. 통일 베트남의 사회주의는 작동하지 않는, 공허한 이념이지만 도이모이 이후 스며든 자본주의는 현실에서 작동하는 강력한 이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베트남인들에게 사회주의는 지난 날 삶을 바닥까지 끌어 당겼던 고달픈 기억의 전부다. 베트남이 짝짝이 양말을 벗고 푸른 빛 새 양말로 고쳐 신을 날이 머지않아 올 것이다. 그날, 하노이의 ‘호 아저씨‘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