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간 사귀었던 한 여자에게 ‘아내’란 별칭이 주어졌다. 무리들 앞에서 손을 들어 맹세 했으므로, ‘남편’이란 별칭은 내 몫으로 돌아왔다. 사회적 공인 의식을 거쳐 그녀와 내가 ‘부부’임이 선포된 것이다. 꼬박 9년만의 일이다. 初夜에 아내의 발과 내 발끝이 닿았을 때 마침내 부부임을 실감했다. 수없이 입술을 열어 내뱉었던 ‘사랑’이란 말도 아내가 된 여자 앞에선 더욱 경건하게 다듬어졌다. 비로소 사랑이 명사가 아니라 동사임을 알 것 같은 순간이 온 것이다. 부부는 한 평생 사랑이란 동사를 가꾸고 매만져 마침내 완성해가는 동업자다.

첫날 밤 잠든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며 ‘사랑함’에 대해 생각했다. 무수히 내 입술에서 배설됐을 그 말이 유독 새삼스레 느껴졌다. 사랑이란 말은 정신적인 아가페적 사랑부터 욕정에 이르기까지 넒은 뜻빛깔을 지녔다. ‘나라를 사랑하자’부터 유행가 가사 속 상투적인 사랑의 말까지 사랑의 의미는 실로 다양하다. 아마도 아내를 맞이하기까지의 내 사랑의 뜻빛깔도 끊임 없이 그 옷을 바꾸었으리라. 게다가 때는 初夜다.

그날 밤, 잠든 아내의 얼굴에서 새삼 발견한 사랑이 있다. 고전적이나 이상적인 그 사랑은 성경의 기자가 적어둔 것이다. 신약성서 고린도전서 13장에 담긴 사랑의 뜻빛깔이다. 성경 기자에 따르면 사랑함이란 이런 것이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고, 친절한 것이고,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는 것이고, 교만하지도 무례하지도 않으며 사욕을 품지 않는 것이고, 성내지 않고 앙심 또한 품지 않는 것이다. 모든 것을 덮어 줘야 하며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내는 것이다.  게다가 기자는 현실과 만나기 힘들어 보이는 이 사랑이 없으면 모든 지식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아무 소용 없다고 말한다.

내가 살아가는 곳이 지구가 맞다면 이런 사랑은 불가능할 테다. 하지만 ‘아내’란 동업자가 허락된 것은 바로 이같은 비현실적 사랑을 현실로 바꾸는 노동을 게을리 하지 마라는 뜻이 아닐까. 한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기로 결심했을 때 고백했었다. 고작 50년을 사랑하겠다는 세상 사람들처럼 하지 말자, 라고. 그것은 세상 사람들과 완전히 다른 사랑을 꿈꿔보자는 제안이었다. 그래서다. 명사였던 사랑이 동사로 거듭나던 날 다짐했다. 우리의 사랑이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뎌내는 것이기를. 그래서 성경 속 사랑에 근접했던 아름다운 부부로 기억되기를 말이다. 모든 것이 처음이었므로 설레었던 그날 밤, 아내의 새끼 발가락은 연신 꼼지락대고 있었다: 아내를 사랑한다. 

  
주말에도 좀체 책을 펼치기가 힘들다. 게을러서다. 꿈쩍도 하기 싫어서다. 내내 잉여가치-결국 내 것도 아닌-를 생산하다 보면 사실 지칠만도 하다. 그러니 잠을 자거나 TV 채널을 돌리는 게 고작이다. 아주 사소한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은 게다. 사실은 잠은 스스로에게 이로운 면이 있다. 하지만 분명히 하자. 잠이란 오직 제 육체만을 배려한 행위다. 와중에 말랑하던 정신은 딱딱하게 굳어간다.  탐면 耽眠 대신 탐독 耽讀이 필요한 이유다.

이정우의 '탐독'을 말한다. 달포 전 내 소박한 독서량을 돌아보게 했다. 고질적인 독서 편력도 꼬집었다. 책에 적힌 이정우 개인의 독서사(史)가 그랬다.  철 들고 처음 읽은 책이 전영택의 '화수분'이라고 그는 적었다. 낡은 책 냄새로 가득한 제 아비의 방에서다. 첫 경험은 강렬했다. 당대 가난의 문제를 섬뜩하게 묘파한 소설 앞에서 소년 이정우는 아연했다. 실존의 문제를 똑똑히 알려준 독서는 그에게 섬뜩하나 매력있는 노동이 됐다.

이정우에게 탐독이란 사유의 여행을 가능케하는 '탈 것'이다. 때로는 문학을 타고, 어떤 날엔 과학으로 갈아탄다. 불쑥 철학에게 자리를 내 주기도 한다. 역사학과 정치경제학이 끼어드는 것은 물론이다. 책은 이토록 요란한 사유-여행에 대한 꼼꼼한 보고서다. 그는 독서에도 '가로 지르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인간의 사유란 총체적이어서 하나의 탈 것만으론 종착지에 다다를 수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영역을 가로지르는 독서가 필요한 것은 그래서다. 전체를 조망하는 지도는  무수한 가로지르기를 거치고서야 완성되는 법이다: 탐독이란 사유-지도를 그려내는 찬란한 노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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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하지 않고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쉽다. 그러나 관찰하면서도 그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노릇인가? 깊은 사색의 노력 없이 단순 소박하기는 쉽다. 그러나 깊이 사색하려는 노력을 하는 단순 소박한 사람이 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자기기만을 감행해가며 낙천적이기는 쉽다. 그러나 자기기만 없이 낙천적이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어리석음을 증오하지 않는 자가 어리석은 인간을 혐오하지 않기는 쉽다. 그러나 어리석음을 증오하면서 어리석은 인간에게 애정을 보내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외롭지 않은 자가 온화하기란 쉽다. 그러나 속절없는 고립 속에서도 괴팍해지지 않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그리고 적개심과 원한을 가슴에 간직하면서 악과 부정과 비열을 증오하기는 쉽다. 그러나 원한 없이 사랑으로 가득찬 마음으로 악과 부정과 비열을 간절히 증오하기란 그 얼마나 어려운 노릇인가? ‘모두’가 아니면 ‘없음’을, 빛나는 영광이 아니면 파멸을 원했던 나의 오만한 마음은, 이리하여 지금 ‘없음’과 파멸의 심연을 바로 눈앞에 보며 쓰러져있다. 악과 부정과 비열에 대한 증오뿐만 아니라, 악과 부정과 비열에 대한 증오에 대한 증오까지도 나의 얼굴을 일그러지게 하고 나의 목소리를 쉬게 했다. 나의 마음을 비틀어 놓았다.
-<서준식 옥중서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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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사건과 관련해 진즉 적었던 글을 지웠다. 사건의 본질과 동 떨어진 이야기만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수치스런 글이었다. 돌이켜보니 그랬다. 사건 자체보다는 개별 인간에 주목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질 못했다. 언론이기 때문이다. 사건 보도 경쟁이 붙으면서 방향은 흔들렸다. 모든 언론이 정치 권력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달렸다. 그러나 애당초 그런 목적지는 존재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모든 사건의 주체는 개별 인간이라는 자명한 진리를 간과했기에 벌어진 일이다.

꼬박 일주일을 이번 사건에 매달렸다. 지충호가 나고 자랐던 인천 학일동 일대를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조선일보의 한발 앞선 보도 때문에 곤혹스러웠던 순간도 있었다. 조선일보는 자사의 정치적 목적에 적확한 기사를 생산했다. 그것은 곧 팩트가 됐고, 그걸 놓친 기자들은 데스크로부터 욕을 먹었다. (변명같지만) 실은 조선일보의 특종 또한 수치스러운 것이었다.  그 또한 본류와 상관 없는 것들로 채워졌던 탓이다. 조선은 별 가진 것 없는 '놈'이 돈을 펑펑썼다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그래서 뒤가 의심스럽다는 투였다. 몰고 가는 듯한 보도는 적잖은 오보를 낳았다. 언론의 권한을 넘어선 부분을 건드리도 했다. 그러나 차분했어야 했다. 정치적 의도로 덧칠된 보도는 기사가 아니다. 차라리 정당 활동이다.

나는 지난 일주일을 '인간'에 대해 고민했다. 주변의 증언을 따라 지충호 개인을 파고 들었다. 취재 방향은 지충호의 과거로 거듭 뒷걸음쳤다. 영화 박하사탕의 내러티브처럼 말이다. 그게 옳다고 믿었다. 모든 인간은 개별적이기 때문이다. 개별 존재로서의 인간은 그저 찬란하다. 순백의 존재다. 개별 인간의 과거를 추적하면 알 수 있다. 아이들의 눈망울을 보라. 그게 개별 인간의 처음이다. 그러나 달라진다. 더럽혀진다. 불가피하지만 그렇게 된다. 비정한 세상 탓이다. 경쟁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어떠한 자본도 지니지 못한 개인은 쉬 파멸한다.  지충호의 개인사가 그랬다. 지인들은 하나같이 그를 '착한 사람'으로 기억했다. 노름도 싸움도 모르는 순둥이라고 했다. 그가 자란 동네는 꽤 유명한 집창촌이었다. 그는 그곳에 입양돼 성장기를 보냈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공간에서다. 애초에 그가 어떠한 형태의 자본도 지닐 수 없었던 이유다.

그런데도 그는 달랐다고 했다. 순둥이처럼 살았다고 한다. 사회적 오점을 한 몸에 지니고서도 말이다. 수십년 동네를 지킨 어른들이 그렇게 전했다. 그러나 그는 한 때 잘못으로 수감 생활을 시작한다. 유부녀와 간통한 죄였다. 그런데 형량이 생각보다 많았다. 그는 억울했다. 곳곳에 하소연을 했다. 그러나 들어주지 않는다. 사회적 오점을 덕지덕지 붙인 그였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대형 사건의 장본인이다. 야당 대표의 얼굴을 칼로 그었다. 당사자가 거물이었기에 그의 범행은 발빠른 정치권의 훌륭한 재료가 됐다. 때마침 선거철을 맞은 나라는 정치적 언어의 해방구가 됐다. 누구도 그를 개별 인간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정치적 배후가 누구냐고 따지기만 했다. 그게 스스로에게 이익을 주기 때문이다. 한 개인의 파멸에 대한 성찰을 따질 여유가 없는 것이다.

지충호는 죄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그게 이 사회의 정의다. 그는 또 한번 수년간 수감 생활을 견뎌야 할 테다. 마땅한 결과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은 자꾸만 불편하다. 구속 수감되는 그를 근거리에서 봤다. 모자를 꾹 눌러쓴 그의 얼굴엔 깊은 주름이 선명했다. 한쪽 눈은 흰 자위가 전부였다. 당뇨로 시력을 잃은 탓이다. 집창촌에서 자란 '착한 아이'는 돌이킬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악인'으로 바뀌었다. 서글펐다. 한 개인의 파멸을 꿰뚫어 보는 일은 그랬다.  개별 존재로서의 인간은 사회와의 투쟁 속에서 끊임없이 더럽혀진다. 그러나 오물을 퍼부은 세상은 책임지지 않는다. 인간은 늘 개별적 존재로서만 고귀한 것이다. 사회와의 투쟁에 패하는 개인은 쓸쓸히 파괴될 따름이다. 세상은 그렇게 비정한 곳이다. 그날, 수감되는 지충호의 그림자는 짙고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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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벌어 밥을 먹는 일은 대체로 피곤한 일이다. 부쩍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좋아하는 글쓰기가 밥벌이가 되고 보니 그렇다. 때로는 쓰고 싶지 않아도 써야 하는 일이 있다. 그 또한 밥벌이니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대학시절, 그러니까 아직 밥벌이를 시작하지 않았던 3년전 썼던 글을 옮겨본다. 나는, 그때의 나로부터 얼마나 달아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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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벌이의 두려움

4년쯤 되었을까. 선배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었다. 집요한 퇴직 권유에 시달렸으니 내쫓겼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지 모른다. 금융자본의 압박에 시달리던 회사는 군살을 빼기로 했다. 이렇다할 실적이 없는 4,5년차들이 주 타깃이 됐다. 한줌의 퇴직금을 쥐어주며 회사는 스스로 나갈 것을 종용했다. 젊고 영민한 인재들이 넘쳐나는 인력시장에서, 용도폐기된 지식인 노동자는 갈 곳을 잃었다. 그를 받아줄 직장은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직장을 잡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어느날 밤, 그는 나를 불러냈다. 그날 밤, 선배는 퍽 취했다. 그의 취기는 울분으로, 울분은 폭언으로, 폭언은 다시 눈물로 이어졌다. 술내 나는 입에선 지루한 신세 타령과 욕설들만 쏟아졌다. 쪼그라든 그의 모습이 한바탕 농담인 것만 같아, 도무지 술을 삼킬 수가 없었다.

그 다음날, 술이 덜 깬 몰골로 마주한 밥 위로 덜 삭은 슬픔이 김이 되어 피어올랐다. 아, 밥!! 이 밥을 벌기 위해 우리는 일하고, 쫓겨나고, 술을 마시고, 분노하고, 울먹이는가. 밥벌이란 결국 밥을 먹기 위함일진대, 그 생명 현상마저 자본이 통제하는 세상은 내가 살아가는 곳인가, 자본이 나를 살게 하는 곳인가. 개인의 밥벌이조차 책임질 수 없다면, 대체 그 잘난 경제 정책들의 날씬한 논리는 무엇이며, 도탄에서 우리를 구원하리라는 시장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이 나라의 평균적 개인들은 밥을 삼키면서, 또 밥을 벌 일을 염려해야 한다. 그것이 그들의 처지다. 지금 밥벌이를 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실업’은 실재하는 현실이며, 밥벌이를 하는 이들에겐 잠재적 현실인 것이다. 왜소해질대로 왜소해진 선배의 울분은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미처 휘발되지 못한 알코올이 어제의 분노를 되새김질 하고 있었다.

졸업 학기를 마쳤으므로 나는 실업자가 되었다. 이제 각종 서류에 내 최종학력은 ‘대졸’이고, 직업은 ‘무직’이라 표기될 터다. 하반기 대졸자가 41만이라고 하니 나도 그 사회적 통계치의 일부일 것이고, 채용규모가 2만이라고 하니 밥벌이를 위한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나 역시 발버둥칠 터다. 이른바 ‘청년실업자’의 대오에 편입된 것이다. 기울어가는 나라 살림은 밥벌이의 초보인 청년실업자들의 몸둘 곳을 더욱 좁힌다. 통계청은 전체 실업률이 3.3%에 달한다는 보고에 이어, 청년 실업률이 7.4%에 이른다는 보도문을 냈다. 하반기엔 청년 4명 가운데 1명은 놀게 될 것이라는 복장 터지는 말도 들린다. 대통령은 연일 고용안정을 외치면서 각료들을 족치지만, 고용의 주체인 기업 앞에선 입을 다문다. 경제 논리로 무장한 기업은 오히려 정부를 다그친다. 그 논리는 노동 시장의 유연화를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는데, 이 노동 시장의 유연화가 곧 청년들의 일자리를 창출하리라 주장한다. 그러나 유연화라는 레토릭은 결국 기업이 마음대로 인력을 잘라내고, 밥벌이를 빼앗고, 거리로 추방하겠다는 말이다. 따라서 그런 유연화된 노동 시장에선, 밥벌이를 구한다 하더라도 늘 추방의 공포에 시달려야 한다.

지금 이 나라의 청년 실업자들은 닭장 같은 도서관에 앉아 누군가가 데려가길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 그들에겐 일자리에서 추방될 수 있는 기회마저 없어 보인다. 밥을 먹기 위해 밥을 벌고, 다시 벌어놓은 그 밥을 입 안에 꾸역꾸역 넣어야 하는 제 운명의 허망함을 탓할 새도 없다. 밥은 다만 실존의 문제이므로, 그저 무조건 먹어야 하는 것이므로 그 밥을 벌기 위해 분칠을 한 채 제 상품성을 뽐내고 있을 뿐이다. 세상은 시장에서 추방된 이들로 넘쳐나지만, 그 빌어먹을 세상에 분노해야할 청년들은 추방된 이들의 빈 자리를 먼저 차지하고자 달려들기에 바쁘다. 밥을 벌어 밥을 먹기 위해선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시장의 은총은 한시적이다. 내 선배가 그러했듯, 시장은 한때 명석했던 청년들을 쓸모가 없어졌으므로 다시 추방할 것이다. 불쌍하다. 나여, 우리여, 청년들이여! 우리에겐 밥 먹는 일조차 고통이고 공포여야 하는가. 우리에게 밥벌이는 이토록 요원한 두려움의 대상이어야 하는가.

하루 세끼를 염려해야 하는 서민들에게, 밥벌이의 두려움에 휩싸인 청년들에게 정부는 또다시 고통 분담을 호소하고 있다. 고통 분담은 이 나라 경제 정책의 가장 낡은 버전임에도, 때만 되면 출몰해서 국민들을 기만한다. ‘나라 살림이 어렵다. 온 국민이 허리띠를 졸라 매자. 조금만 기다려 달라. 선진국이 코앞이다. 국민소득 2만 달러는 국민들이 뼈를 깎는 고통을 나누어 가질 때 비로소 가능하다’. 그러나 밥벌이를 걱정하는 이들에게 그 말은 먹혀들지 않고, 파업은 슬금슬금 번지고 있다. 부디 나라의 정책을 주무르는 사람들아, 이런 말 같잖은 논리로 더 이상 국민들을 속이지 마라. 고통 분담이란 고통을 나눈다는 말일진대, 어찌하여 가진 것 없는 이들만 매번 일자리를 잃고서 추방돼야 하는가. 대통령이 입만 열면 하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라는 말은 결국 밥벌이를 시작조차 하지 못한 청년들과, 밥벌이를 빼앗긴 서민들에게 고통을 ‘전담’하려는 뜻은 아닐는지. 고통 분담에 대한 정부의 실천적 의지가 없다면, 또다시 한 무리의 추방자들만 양산될 터다. 밥벌이를 구하면서 추방의 공포를 당겨 체험해야 하는 이 나라의 청년들은, 서민들은 그래서 늘 두렵다. 추운 여름이 지나가고 있다.

  
리처드 줄리아노티 지음 ㅣ 현실문화연구 ㅣ 2004년 8월

부쩍 축구에 미쳐간다. 전에 없던 현상이다. 존경하는 선수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게 아니다. 머리 숙여 그들을 존경한다. 루니, 앙리, 박지성, 세브첸코 들이 그런 인물이다. 이유는 또렷하지 않다. 그러나 막연하게는 안다. 축구에 대한 열정은 연애와 유사한 토대를 지녔다. '피버 피치(닉 혼비, 문학사상)'라는 훌륭한 책이 밝혔듯이 말이다. 그건 덮어놓고 빠지는 거다. 머리 속에 축구를 담아내선 그런 열정이 생기지 않는다. 축구와의 연애란, 이성보다는 감성의 코드와 접속하는 행위다. 마치 '그녀'와의 뜨거운 사랑처럼.

줄리아노트의 '축구의 사회학'을 재독했다. 감성 지배적인 축구에 대한 열정을 이성으로 해부해보고 싶어서다. 이 책은 축구를 계급적, 인종적, 역사적 관점에서 분해하고 있다. 전제는 축구가 지구적 현상이라는 거다. 그래서 '지구를 정복한 축구공, 지구를 말하다'가 부제로 매달려있다.  책은 축구에 대한 이성-인식의 지평을 넓혀 준다. 중국에서 출발한 축구가 영국을 거쳐 전 지구를 지배하게 되는 전체 과정에 대한 꼼꼼한 보고가 담겼다. 서포터스, 축구장, 미디어, 축구 스타, 전술, 정치학 등 다양한 렌즈로 축구를 살피는 맛도 일품이다.

전 지구적 현상인 축구에는 세계가 함께 고민하는 제반 문제들이 담겨있다. 줄리아노트가 그렇게 전한다. 계급 갈등이나 인종 차별, 세계화 등 사회학적 테마가 축구에서도 엿보인다. 축구가 세계를 이해하는 창이 될 수 있는 까닭이다. 축구는 인간의 몸을 사용하는 운동이다. 본질적으로 그렇다. 여기에 각종 규칙이 몸과 몸이 평등하게 겨루게끔 한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은 그같은 본질을 조금씩 흐린다. 몸이 아닌 다른 요소가 축구에 끼어든다. 늘려쓰면 이런 이야기다. 브라질에는 유명한 라이벌 클럽이 있다. 그런데 이 클럽들은 종종 계급적, 인종적 이해 관계를 드러낸다. 빈민가 대표 클럽 플라멩고와 반(反)흑인 클럽 플루미넨세가 그렇다. 두 클럽의 축구 경기에선 계급적 적대감과 인종적 분열이 꿈틀댄다.

인간의 몸이라는 본질을 벗어난 축구는 점점 예측 가능한 승부를 낳기도 한다. 자본의 흐름이 자유로운 세계화 시대엔 그같은 흐름은 대세다. 자본은 축구 경기의 스코어마저 스스로 통제할 기세다. 첼시가 대표적인 예다. 첼시는 깔끔한 조직 축구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를 2년 연속 재패했다. 그런데 그들의 축구는 종종 싱겁다. 결과가 뻔한 것이다. 아브라모비치의 폭발적인 자본력이 그렇게 만들었다. 발락을 사들이더니 최근에는 세브첸코도 데려간다고 한다. 자본은 오직 자본의 이익에 봉사하는 법. 축구가 다소 싱겁더라도 예측 가능한 승률을 위해 돈을 푸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불순한 운명에도 불구하고 축구는 사랑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역설적으로 축구가 인간에 가장 가까운 스포츠여서다. 자본과 과학과 기술이 축구를 반인간적 스포츠로 몰고 가는 것은 분명하다. 비싼 선수를 사들이고 최첨단 분석을 통해 마련된 전략은 축구를 계급적으로 고착화시키는 행위일 테다. 그럼에도 축구는 인간의 몸이 만들어내는 예술과도 같다. 화려한 플레이어를 보유한 프랑스가 이름도 생소했던 세네갈에 맥없이 무너진 일을 기억하여 보라. 인간의 몸이 정직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몸이 움직이는 만큼 골도 터지기 때문이다. 이변이 가장 많은 스포츠가 축구인 것도 그래서다. 축구는 계급적, 인종적, 세계화의 문제로 위태롭지만, 여전히 인간의 편으로 보인다. 몸은 몸으로서 늘 평등하기 때문이다. 축구의 사회학은 축구의 인간학의 다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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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대학을 찾았다. 온통 초록빛으로 다림질 된 캠퍼스는 눈부셨다. 곳곳에서 봄 축제가 한창이었다. 여대생들이 새떼 울음 같은 웃음 소리를 뱉으며 지나갔다. 힙합 바지에 머리통만한 헤드폰을 뒤집어 쓴 남학생 무리는 춤 연습에 흐느적 거렸다. 캠퍼스의 젊음은 향기로웠다. 졸업 후 세계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없어 보였다. 그들은 그저 웃었고, 흐느적거렸으며, 다시 웃었다. 대학의 젊음이란 그런 것이었다: 까닭 없는 호탕함!

근대를 흔히 다양성의 사회라고 한다. 대학은 그런 근대의 자유분방함의 맨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믿어진다. 하지만 이 말은 거짓이다. 자본주의가 새롭게 건설한 근대는 다시 중세로 뒷걸음치는 모양새다. 중세처럼 전형화된 인간군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날 모든 인간은 ‘소비 대중’으로 전형화돼 있다. 너도 나도 돈을 쓰는 주체일 뿐이다. 자본이 그렇게 만들었다. 쓰기 위해선 돈이 필요하다. 그래서 제 몸을 팔아(노동) 돈을 벌어야 하는 지루한 과정이 거듭된다.

이같은 ‘슬픈 전형’을 봄의 대학생들은 알지 못한다. 제게 닥칠 자본주의적 삶의 비애를 당겨 체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적어도 덜 핍진적인 사회에 속해있는 탓이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핍진적인 노동사회의 일원이 되면 달라진다.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급격히 소비 대중으로 굳어져 간다. 내 얼굴을 지우고 조금씩 자본의 오물에 더렵혀져 가는 것이다. 어쩔 도리가 없다. 자본이 강요하는 세상에서 인간들은 불가피하게 더럽혀진다. 살아남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 나라는 그런 불가피한 더러움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대학을 나오고도 갈 곳이 없다. 대개의 요즘 대학생들이 그렇다. 10명중 4명꼴로 무작정 놀고 있다는 조사도 있다. 어학연수니 인턴이니 은근슬쩍 졸업 시기를 늦추는 것도 그래서다. 하지만 뾰족한 수는 없다. 노동의 기회란 결국 자본이 손을 내밀 때 찾아오는 특권인 것이다. 더럽히는 것도 자본일진대, 그 오물 자국조차 자본의 축복으로 둔갑한 셈이다. 축제를 맞은 대학의 초록빛은, 그래서 늘 불안한 빛깔로서 적막하다.

K.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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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방에서 바라본 풍경. 우리 동네 화곡동은 저 멀리 보이는 목동과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단절을 이루고 있다.
  

지난 3월 이사온 내 방. 제법 깔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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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한 아동 미술전문가와 저녁을 했다. 한동안 잊고 있던 말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동심童心. 어린 아이의 마음 또는 세계관이란 뜻일 게다. 특히 미취학 아동들의 정신 세계를 뜻한다고 그는 소리높여 말했다. 그가 들려주는 아이들의 그림 이야기는 놀라웠다. '가족'이 그림의 주제였다고 했다. 한 아이는 주먹이 얼굴보다 큰 아빠와 입이 얼굴의 반쯤 차지한 엄마의 얼굴을 그렸다고 한다. 싸움이 잦은 부모를 아이는 그렇게 표현했다. 다음은 '자연'이라는 주제. 한 아이가 뱅글뱅글 돌며 내려오는 빗방울을 그렸다. 다른 아이의 비는 빨간색이거나 노란색, 혹은 초록빛이었다.

"아이의 마음으로 보면 이 세상에 정해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변하고, 움직입니다." 이 말을 할 때 그의 눈은 아이처럼 초롱댔다. 정말 그랬다. 아이란 어른이 강요하는 질서에서 비껴 서있는 존재다. 제 아무리 강요해도 소용 없다. 아이는 인간의 개별성이 최고치에 달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이는 홀로 생각하고, 이 세계를 홀로 그려낸다. 아이들은 진리가 여러 겹임을 스스로 증명해 보인다. 세계를 규정하는 온갖 질서를 극복하기 위해선 바로 아이와 같은 마음이 필요하지 않을까. 어른이 된다는 것은 세계를 비뚤게 보는 법을 상실해 온 세월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변혁이란 진리는 독점될 수 없다는 자명한 이치를 깨닫는 데서 시작된다. 그 맨 앞에 동심이 있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06.04.30.
K.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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