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을 벌어 밥을 먹는 일은 대체로 피곤한 일이다. 부쩍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좋아하는 글쓰기가 밥벌이가 되고 보니 그렇다. 때로는 쓰고 싶지 않아도 써야 하는 일이 있다. 그 또한 밥벌이니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대학시절, 그러니까 아직 밥벌이를 시작하지 않았던 3년전 썼던 글을 옮겨본다. 나는, 그때의 나로부터 얼마나 달아난 것일까.
======================
밥벌이의 두려움
4년쯤 되었을까. 선배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었다. 집요한 퇴직 권유에 시달렸으니 내쫓겼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지 모른다. 금융자본의 압박에 시달리던 회사는 군살을 빼기로 했다. 이렇다할 실적이 없는 4,5년차들이 주 타깃이 됐다. 한줌의 퇴직금을 쥐어주며 회사는 스스로 나갈 것을 종용했다. 젊고 영민한 인재들이 넘쳐나는 인력시장에서, 용도폐기된 지식인 노동자는 갈 곳을 잃었다. 그를 받아줄 직장은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직장을 잡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어느날 밤, 그는 나를 불러냈다. 그날 밤, 선배는 퍽 취했다. 그의 취기는 울분으로, 울분은 폭언으로, 폭언은 다시 눈물로 이어졌다. 술내 나는 입에선 지루한 신세 타령과 욕설들만 쏟아졌다. 쪼그라든 그의 모습이 한바탕 농담인 것만 같아, 도무지 술을 삼킬 수가 없었다.
그 다음날, 술이 덜 깬 몰골로 마주한 밥 위로 덜 삭은 슬픔이 김이 되어 피어올랐다. 아, 밥!! 이 밥을 벌기 위해 우리는 일하고, 쫓겨나고, 술을 마시고, 분노하고, 울먹이는가. 밥벌이란 결국 밥을 먹기 위함일진대, 그 생명 현상마저 자본이 통제하는 세상은 내가 살아가는 곳인가, 자본이 나를 살게 하는 곳인가. 개인의 밥벌이조차 책임질 수 없다면, 대체 그 잘난 경제 정책들의 날씬한 논리는 무엇이며, 도탄에서 우리를 구원하리라는 시장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이 나라의 평균적 개인들은 밥을 삼키면서, 또 밥을 벌 일을 염려해야 한다. 그것이 그들의 처지다. 지금 밥벌이를 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실업’은 실재하는 현실이며, 밥벌이를 하는 이들에겐 잠재적 현실인 것이다. 왜소해질대로 왜소해진 선배의 울분은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미처 휘발되지 못한 알코올이 어제의 분노를 되새김질 하고 있었다.
졸업 학기를 마쳤으므로 나는 실업자가 되었다. 이제 각종 서류에 내 최종학력은 ‘대졸’이고, 직업은 ‘무직’이라 표기될 터다. 하반기 대졸자가 41만이라고 하니 나도 그 사회적 통계치의 일부일 것이고, 채용규모가 2만이라고 하니 밥벌이를 위한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나 역시 발버둥칠 터다. 이른바 ‘청년실업자’의 대오에 편입된 것이다. 기울어가는 나라 살림은 밥벌이의 초보인 청년실업자들의 몸둘 곳을 더욱 좁힌다. 통계청은 전체 실업률이 3.3%에 달한다는 보고에 이어, 청년 실업률이 7.4%에 이른다는 보도문을 냈다. 하반기엔 청년 4명 가운데 1명은 놀게 될 것이라는 복장 터지는 말도 들린다. 대통령은 연일 고용안정을 외치면서 각료들을 족치지만, 고용의 주체인 기업 앞에선 입을 다문다. 경제 논리로 무장한 기업은 오히려 정부를 다그친다. 그 논리는 노동 시장의 유연화를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는데, 이 노동 시장의 유연화가 곧 청년들의 일자리를 창출하리라 주장한다. 그러나 유연화라는 레토릭은 결국 기업이 마음대로 인력을 잘라내고, 밥벌이를 빼앗고, 거리로 추방하겠다는 말이다. 따라서 그런 유연화된 노동 시장에선, 밥벌이를 구한다 하더라도 늘 추방의 공포에 시달려야 한다.
지금 이 나라의 청년 실업자들은 닭장 같은 도서관에 앉아 누군가가 데려가길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 그들에겐 일자리에서 추방될 수 있는 기회마저 없어 보인다. 밥을 먹기 위해 밥을 벌고, 다시 벌어놓은 그 밥을 입 안에 꾸역꾸역 넣어야 하는 제 운명의 허망함을 탓할 새도 없다. 밥은 다만 실존의 문제이므로, 그저 무조건 먹어야 하는 것이므로 그 밥을 벌기 위해 분칠을 한 채 제 상품성을 뽐내고 있을 뿐이다. 세상은 시장에서 추방된 이들로 넘쳐나지만, 그 빌어먹을 세상에 분노해야할 청년들은 추방된 이들의 빈 자리를 먼저 차지하고자 달려들기에 바쁘다. 밥을 벌어 밥을 먹기 위해선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시장의 은총은 한시적이다. 내 선배가 그러했듯, 시장은 한때 명석했던 청년들을 쓸모가 없어졌으므로 다시 추방할 것이다. 불쌍하다. 나여, 우리여, 청년들이여! 우리에겐 밥 먹는 일조차 고통이고 공포여야 하는가. 우리에게 밥벌이는 이토록 요원한 두려움의 대상이어야 하는가.
하루 세끼를 염려해야 하는 서민들에게, 밥벌이의 두려움에 휩싸인 청년들에게 정부는 또다시 고통 분담을 호소하고 있다. 고통 분담은 이 나라 경제 정책의 가장 낡은 버전임에도, 때만 되면 출몰해서 국민들을 기만한다. ‘나라 살림이 어렵다. 온 국민이 허리띠를 졸라 매자. 조금만 기다려 달라. 선진국이 코앞이다. 국민소득 2만 달러는 국민들이 뼈를 깎는 고통을 나누어 가질 때 비로소 가능하다’. 그러나 밥벌이를 걱정하는 이들에게 그 말은 먹혀들지 않고, 파업은 슬금슬금 번지고 있다. 부디 나라의 정책을 주무르는 사람들아, 이런 말 같잖은 논리로 더 이상 국민들을 속이지 마라. 고통 분담이란 고통을 나눈다는 말일진대, 어찌하여 가진 것 없는 이들만 매번 일자리를 잃고서 추방돼야 하는가. 대통령이 입만 열면 하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라는 말은 결국 밥벌이를 시작조차 하지 못한 청년들과, 밥벌이를 빼앗긴 서민들에게 고통을 ‘전담’하려는 뜻은 아닐는지. 고통 분담에 대한 정부의 실천적 의지가 없다면, 또다시 한 무리의 추방자들만 양산될 터다. 밥벌이를 구하면서 추방의 공포를 당겨 체험해야 하는 이 나라의 청년들은, 서민들은 그래서 늘 두렵다. 추운 여름이 지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