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서니 기든스 저 | 을유문화사 | 원제 WHERE NOW FOR NEW LABOUR | 2004년 02월
기든스의 '노동의 미래'를 읽는 일은 불편하다. 옮긴이(신광영)는 이 책에 담긴 기든스의 정책적 상상력에 찬사를 보낸다. 정책적 상상력이야말로 기든스가 부드디외, 하버마스 들과 갈라지는 부분이라 말한다. 역자 서문에 그렇게 써있다. 그러나 그 말은 과장됐다. 책에서 기든스가 신노동당에 내놓는 정책들은 하나 같이 그른 것이 없다. 적어도 영국적 상황에선 그렇다. 하지만 그 정책들이 기든스표 '제3의 길'과 맞닿는 지점을 찾기란 어렵다. 그래서 읽기에 불편하고, 불편해서 괴롭다. 책읽기를 마치도록 제3의 길이 또렷이 그려지지 않는 탓이다.
좌도 우도 아닌 세계. 그곳이 기든스가 말하는 '제3의 길'이 통하는 곳이다. 정확지는 않지만 대강 이해하기론 그렇다. 그곳에선 이념이 물러나고 실용이 지배한다. 그래서 '주의(主義)' 대신 '정책'이 전면에 나선다. 그렇다면 의문 하나. 기든스는 무슨 까닭에서 영국 노동당을 사민주의 전통을 잇는 당이라 주장하는 걸까. 그가 이 물음에 답하기란 쉽지 않을 테다. 기든스는 “클린턴식 미국 민주당이 영국 신노동당의 모델이었다”(p.28)라고 말한다. 그러나 보수 정당이 사민주의 정당의 모델은 아닐 것이다. 결국, 기든스에게 사민주의 어쩌고 하는 것은 죄다 레테르에 지나지 않는다. 이미 닳아빠진, 그러나 버릴 수 없는 포장지!
스스로를 '진보'라 '믿는' 이들에겐 흔히 보이는 오류가 있다. 스스로가 '선'이고 싶은 강렬한 자기애. 그에서 파생되는 편집증적 세계 인식. 기든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게 내 생각이다. 복지 축소, 공공 서비스의 민영화, 감세 정책 등 신노동당의 정책적 좌표를 설정한 그다. 신노동당(New labor)은 이미 노동당이 아니다. 그래서 '네오(neo)' 대신 '뉴(new)'란 말이 붙었다. 보수 정당과 다른 지점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기든스는, 그의 신노동당은 스스로 좌파 혈통에 잇닿아 있음을 주장한다. '제3의 길'이란 정체 불명의 개념을 통해서다.
진보와 보수가 선악의 잣대가 아닐질대, 그렇게까지 스스로를 포장할 필요가 있을까. '제3의 길'이란 어정쩡한 말 대신 스스로의 보수적 정체성을 까발리는 편이 더 정직하다. 이 책에 담긴 기든스는 붉은 장미를 수놓은 옷을 입고 우향우를 하는 모습이다. 정부의 역할, 평등에 대한 인식, 복지 정책에 대한 재검토 등 책에 담긴 그의 생각은 결코 고전적 사민주의의 것이 아니다.
그 생각의 옳고 그름은 나는 모르겠다. 사회적 형편에 따라 그것은 옳을 수도 그를 수도 있다. 정책은 매순간 상황에 따라 선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겠다. '진보와 보수'를 '선과 악'의 동의어로 보고, 스스로를 포장하는 건 어떠한 건강한 사회적 공론도 형성하지 못한다. 이를테면 그것은 '실용주의'니 '제3의 길'이니 하는 허망한 정치적 언어만을 양산할 따름이다.
사안별로 개인의 이성을 따라 의견을 제출하라. 그래서 그 무수한 의견들이 소리내 말하게 하라. 그 편이 옳다. 진보니 보수니 떠들어선 공론의 장이 열리지 않는다. 싸움판이 벌어질 뿐이다. 진보가 반드시 옳고 보수가 반드시 그른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정직할 것이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덧붙임: 김치수의 지적 하나.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보수주의가 자리잡고 있는데도 진보주의자인 척할 때는, 사소한 것에 과격해지고, 본질적인 것에는 무관심해진다." 옳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