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현세설 에 해당하는 글 : 20 개
2008/09/26 :: 아비가 아들에게 (2)
2008/07/27 :: 국회의원 곽정숙 (1)
2008/05/13 :: 원스
2008/01/14 :: 불면
2006/10/27 :: 청혼(조기영)
2006/10/16 :: 북한 생각
2006/10/08 :: 라디오 스타
2006/09/28 :: 고건 생각
2006/09/17 :: 아내 (1)
2006/06/02 :: 인간
2006/06/02 :: 밥벌이 (2)
2006/05/18 :: 대학
2006/05/11 :: 동심 (2)
2006/05/11 :: 제보
2006/05/11 :: 추모
2006/05/11 :: 서른
여든 일곱의 아비가 예순 다섯 아들의 손을 잡는다.
기력이 쇠한 노수(老手)는 쭈그러진 또 다른 노수를 가만히 쓰다듬는다.
여든 일곱의 눈이 촉촉해진다. 예순 다섯은 습한 눈을 애써 외면한다.
“아부지, 오도바이 소리가 영 시끄럽네예, 맞지예?”
예순 다섯이 슬그머니 마당으로 나선다. 축 늘어진 여든 일곱 노구는 별 대꾸를 못한다.
대문 밖 부릉부릉 엔진 소리 요란하다.
여든 일곱 노구를 실어나르는 전기 스쿠터가 제 존재감을 과시한다.
예순 다섯이 ‘오도바이’를 손질하고 있을 때 여든 일곱의 할배가 손주를 찾는다.
서른 둘의 손주는 할배 앞에 무릎을 꿇는다.
서른 둘의 악력에 사로잡힌 할배의 팔이 앙상하다.
“느그 아부지, 요새 마이 아프다매, 내가 큰 걱정인기라...”
여든 일곱의 아비가 예순 다섯의 아들을 염려한다.
하늘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는 노구가 시나브로 노인이 돼가는 아들의 몸을 염려한다.
“느그 아부지, 우리 아들 좋은 약 구해줄 수 있제?”
인간이 인간을 낳는 일.
할배가 아비를, 아비가 아들을 낳는 일.
할매가 애미를, 애미가 딸을 낳는 일.
할매가 아비를, 아비가 딸을 낳는 일.
할배가 애미를, 애미가 아들을 낳는 일.
그 지독하고 아름다운 운명.
노곤한 가을 햇살에 감나무가 제 몸을 축 늘어뜨린 청도에서
여든 일곱 아비가 예순 다섯 아들의 손을 매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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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공부중인 친구 녀석이 제 블로그에 “내년이면 한국 나이로 33세가 되는 아들에게 아직까지 경제적 지원을 해야만 하는 엄마 아빠에게 아들이 그 돈으로 엿 사먹은 것만은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라고 써 놓았다. 녀석의 ‘아빠’는 이런 댓글을 달았다. “33살이 아니라 50살이 되어도 너는 나의 아들이다. 다른 나라에 비해서 돈이 덜 든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부담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있다.”

아름다운 댓글 대화를 엿보다가 문득 추석 풍경이 떠올라 글로 옮겼다.



  
                                 
                                               
여의도 국회의사당은 언어의 종말 처리장이다. 멀쩡한 사람도 배지를 달면 입이 험해진다. 정치 언어엔 권력 투쟁의 잔혹성이 그대로 덧칠돼 있다. 쏟아지는 정치 언어 앞에 국무총리도 장관도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다. 혹여 각료들이 의원들에게 대드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땐 동료 의원들이 죄다 튀어 올라와 “말버릇이 그게 뭐냐”며 호통친다.

대정부 질문이란 그런 정치 언어의 저급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이벤트다. 요 며칠 각료들은 긴급현안질의를 받느라 여의도 바닥을 오갔다. 의원들은 각료들을 거칠게 다뤘다. 나라 꼴이 이게 뭐냐고 꾸짖었다. 총리가 ‘의원님 말씀’에 토를 달다가 혼쭐이 났다. 국회의원의 목은 늘 빳빳하다. 악취나는 언어를 목구멍으로 뱉어내려면 도리 없다, 빳빳할 수밖에.

그들 틈에도 보석처럼 반짝이는 이들이 더러 있긴 하다. 주로 사회적 약자를 대신해 국회에 입주한 경우다. 민주노동당 곽정숙 의원이 그렇다. 그는 척추장애란 참혹한 운명을 타고났다. 긴급현안질의가 있던 날, 곽 의원은 종일 턱걸이하듯 책상에 매달려 있었다. 1미터 20센티미터를 겨우 넘는 키 때문이다. 건장한 남성 의원들이 신나게 각료들을 족칠 때, 척추장애로 쪼그라든 여성 의원은 한없이 높은 책상과 싸워야 했다.

턱걸이 하듯 책상에 매달려서도 곽 의원은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현안질의가 끝나자 의원들은 빳빳한 목을 풀고 사사로운 잡담을 시작했다. 와중에 곽 의원은 조용히 신상발언을 신청했다. 그가 작은 키로 몽당몽당 발언대로 걸어나올 때 의원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장애인이 국회에 들어오니까 많이 불편합니다. 저는 키가 작고 특별히 앉아 있을 때 불편함이 많아 제 몸에 맞는 좌석 개조가 필요합니다.” 이 말을 할 때 곽 의원은 얼굴을 무너뜨리며 웃었다. “저는 장애인 대표입니다. (불편한 책상을 쓰며) 제 앞가림도 못한다면 500만 장애인들이 저를 어떻게 신뢰하겠습니까.” 이 말을 내뱉을 때 곽 의원의 얼굴에선 비장함이 피어올랐다.

국회의장은 곽 의원에게 “곧 시정하겠다”는 의례적인 답변을 건넸다. 그러곤 나무 망치를 세번 두드려 폐회를 선언했다. 정치 언어를 배설한 의원들은 기름진 얼굴로 본회의장을 빠져나갔다. 곽 의원은 제 키만한 책상을 거슬러 몽당몽당 그들을 뒤따랐다. 그날 누구도 곽 의원의 책상에 대해 말하진 않았다.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선 정당한 언어가 늘 종말 처리된다.
  
음악은 종종 사랑의 대명사다. 모든 사랑이 그렇진 않지만, 어떤 사랑은 멜로디에, 특히 가사에 실려 깊이 감각되곤 한다. 헤어진 연인들이 유행가 가사에 목놓아 울어버리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더구나 함께 듣던 음악이라면 그 울음의 진폭은 더욱 증폭된다.

아예 음악으로 맺어진 사랑이라면 어떨까. ‘원스’는 사랑과 음악이 동일한 궤적을 그리는 영화다.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는 남자. 진공청소기 수리공인 이 남자는 실연의 아픔을, 극한의 그리움을 절규하듯 노래로 뱉어낸다. 그의 절규에 발걸음을 멈춘 여자. 여자 역시 사랑의 결핍을 음악(피아노 연주)으로 달래는 인물이다.

음악이 이야기를 근사하게 뒷받침하는 영화는 더러 있다. 아예 음악을 이야기하는 영화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음악과 이야기가 스미고 짜이면서 영상과 멜로디의 경계를 효과적으로 허물어낸 영화는 흔치 않다. ‘원스’는 이야기하듯 노래하고, 노래하듯 이야기하는 영화다. 두 남녀의 결핍의 순간들을 음악으로 꾹꾹 눌러 채워가며 소소한 사랑 이야기를 풀어낸다.

눅눅한 더블린의 풍경처럼 이 영화를 빼곡 채운 정서는 외로움이다. 텅 빈 거리에서라야 자작곡을 풀어내는 그 남자도, 몸을 한껏 움츠린 채 홀로 걸어가며 ‘If you want me’를 읊조리는 그 여자도 외로움에 휘감겨 하루하루를 견뎌내긴 매 한가지다.

영화에서 둘의 사랑이 격렬하게 번지지 않는 까닭도 (각자 다른 대상 때문에) 그들 내부에 퍼져 있는 이런 지독한 외로움의 정서 때문이다. 잔잔하게 시작했다 포르르 끝나버리는 이 영화는 사랑이 종종 외로움과 맞닿아있음을 노래하고 있다. 모든 사랑의 출발은 결핍이고, 그 결핍을 넉넉히 메우는 것 또한 사랑일테지만, 사랑은 자주 더 큰 외로움을 낳기도 한다.

K.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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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부는 날 자전거는 홀로 꼿꼿하다. 무작정 불어오는 풍경을 밀쳐내며 자전거는 거친 땅 위를 변주한다. 그럴 땐 자전거 위에 실린 내 육체도 바짝 조여온다. 바람과 바퀴가 빚어내는 변주가 내 육체를 들썩이고, 그 불규칙한 리듬을 따라 내 마음의 줄도 요동친다.

그날도 바람이 몹시 거셌다. 무언가에 홀린 듯 오후 네시까지 잠에 빠졌던 날이었다. 한 차례의 악몽과, 두 차례의 해석 불가능한 꿈을 꾼 뒤였다. 함박 젖은 땀에 섹섹 들리는 숨소리가 유쾌하지 않아 잠을 깼던 것 같다. 자전거를 끌고 나선 건 그런 흐느적이는 몸을 감당할 길이 없어서였다.

봄빛에 물든 일산은 눈부셨다. 세찬 바람에도 봄의 아름다움은 견고해 보였다. 아니, 거대한 폭풍이 이 모든 풍경을 날려버린다 해도 가루가 된 봄빛은 아름다울 터였다. 가루가 되어 흩날리는 봄빛 속을 내 흐믈대는 육체가 뚫고 지나갔다. 권태롭게 짓밟아대는 자전거 페달에 몸을 의탁한 채.

저녁 어스름이 가까워오는 시간인데도 호수는 제법 붐볐다. 한 무리의 청년들이 줄지어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고 지나갔다. 그들의 발사위를 따라 대지는 한결 매끄러워졌다. 인라인의 행렬이 한 차례 닦아낸 길위를 자전거는 덜컹거리며 뒤따랐다.

자전거 도로 위로 두 여성이 불쑥 뛰어들었다. 끼익 하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자전거 도로 위를 침범한 건 그들이었으나 그들을 나무랄 순 없었다. 바람 부는 날 자전거는 세상의 모든 풍경을 지워버리곤 한다. 지워진 풍경 속에서 두 여성은, 두 모녀는 서로를 꼭 껴안고 있었다. 중년의 여성이 여고생의 발그레한 뺨을 막 부비려던 찰나였다. 끼어든 건 외려 나였다. 사랑으로 충만한 모든 것들은 침범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이어폰에선 익숙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울먹이듯 들리는 노래가 아찔해 자전거를 급히 세웠다. 이날 하루를 뜨겁게 달구었을 빛은 호수 아래까지 내려와 있었다. 수면을 매만지듯 비취는 빛 아래로 호수가 들썩이고 있었다. 세찬 바람을 이기지 못한 탓일까. 호수는 더이상 출렁이지 않았다. 거대한 용암이 꿈틀대듯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울룩불룩 요동치는 수면을 껴안은 채 호수는 속수무책이었다.

봄의 호수를 거슬러 오는 길. 자전거도 나도 지친 듯 몹시 비틀댔다. 세상의 모든 소리도, 불어오는 모든 풍경도, 흩날리는 모든 봄빛도 이미 모습을 감춘 뒤였다. 권태로운 페달질을 거듭하며 나는 두 차례의 해석 불가능한 꿈을 떠올렸다. 바람 부는 날 일산의 호수는 오래도록 달궈진 냄비 같았다. 부글부글 끓고있는 호수를 보고 있자니 또다시 졸음이 쏟아졌다.

K.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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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바람이 내 얼굴을 쓱 문지른다. 바람이 부는 쪽으로 등을 돌려보려 하지만 어디서 불어오는지조차 가늠하기 힘들다. 숨이 막힐 정도로 매서운 바람이 종일 들어차고 나가길 되풀이한다. 지퍼를 목까지 끌어올려도 가슴으로 심장으로 바람이 파고든다. 전날 한뼘쯤 얼굴을 내민 봄바람에 덜컥 속아버린 내 탓이다. 겨울이 가버렸나 싶어 옷을 두텁게 챙기질 못했다. 한해의 시작과 끝이 동시에 존재하는 겨울은 환(幻)의 계절이라지. 얼얼한 기운에 머릿속마저 얼어버리면 우리의 정신은 종종 몽롱해진다. 겨울 바람이 매서우면 매서울수록 더더욱.

찬 바람을 뚫고 오후엔 제법 걸었다. 핸들이 휘어버려 수리를 맡긴 자동차를 찾으러 나선 길이었다. 주말을 맞이한 일산에선 부산함을 찾을 수 없었다.매서운 날씨에 몽롱해진 사람들이 제 방 안으로 숨어버린 탓이리라. 길 건너편 행인의 구둣발 소리가 또각또각 들릴 정도로 주말 오후의 도시는 적막했다.

귀를 꼭 감싸쥔 채 알미 공원 앞을 지나는데 털모자에 털장갑, 마스크까지 걸친 중년 부부가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습관처럼 먼 곳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서로 아무런 말도 없이 그렇게 한참을 시선을 자꾸만 먼곳으로 달아나게 내버려두고 있었다. 무엇이 저들을 저토록 심드렁하게 만들었을까. 그들은 참을 수 없는 권태를 겨우겨우 구겨넣은 채 일상을 견디는 듯 보였다.

자동차는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했다. 핸들이 조금 휘었나보다 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차 밑바닥 부품을 싹 갈아야했다. 수리비만 35만원. 적지 않은 돈을 들여 핸들은 제 방향을 찾았다. 찻길에서 핸들을 꺽어 잡아야하는 불편함도 사라졌다. 거짓말처럼 자동차는 핸들이 지시하는대로 움직이는 원래 상태를 회복했다. 우리 삶도 그럴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쪽 한 구석이 심하게 망가졌군요. 수리비만 지불하면 깨끗하게 복원시켜 드리죠.

제 모습을 찾은 핸들을 잡고 서점으로 차를 몰았다. 마음이 스산할 때 의욕이 밑바닥을 칠 때 자주 찾는 곳이다. 한달새 참고서 코너가 확 넓어졌다. 그런데도 여전히 인문 분야는 부실하다. 인간을 고민하기보다 인간을 짓밟아야 살아남는 세계에선 당연할 일일 것이다.

이동진의 책을 엿보다가 ‘비포선셋’이란 영화를 떠올렸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하룻밤 사랑을 나눈 제시와 셀린('비포 선라이즈')의 9년 뒤 이야기다. 제시와 셀린은 단 하룻밤에 제 생애 전체에 걸쳐 풀어내야할 사랑을 한꺼번에 쏟아버린 채 이별한다. 6개월 뒤 빈 기차역에서 만나자는 약속만 남긴 채. 둘은 다시 만났을까. ‘비포선셋’은 빈 역에서의 이별 이후의 이야기다.

9년 뒤 제시는 소설가로, 셀린은 환경운동가로 살아간다. 둘의 하룻밤 이야기를 소설로 써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제시가 파리를 방문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제시의 인터뷰가 한창인 헌책방(Shakespeare and company)으로 셀린이 찾아가면서 둘은 9년만에 재회한다. 빈의 하룻밤 이후 6개월 뒤 만나자는 약속은 실현됐을까. 제시는 빈 역에서 기다렸지만 셀린은 나타나지 않았다. 할머니의 갑작스런 죽음 때문이었다. 모든 걸 쏟아부었던 사랑과 기약없는 이별, 그리고 9년 뒤의 재회. 둘의 사랑은 어떻게 됐을까.

예전에 흘려봤었던, 흔해 빠진 사랑 이야기일 이 영화를 다시한번 끄집어내 봤다. 영화 속에 담긴 파리는 낡아서 아름다웠다. 9년이란 세월을 빨아들인 제시와 셀린은 낡았으나 아름다운 사랑을 조심스레 확인해간다. 서로의 손을 잡을 듯 말듯, 머리를 쓰다듬을 듯 말듯 조심스러워하며 파리지앵의 뒷골목을 걸으면서. 비행기 출발 시간을 2시간 남겨두고 시작된 둘의 9년만의 재회는 헤어짐의 순간을 네번이나 지연시키며 끊어질듯 이어진다. 제시는 그간 결혼을 했고 아들을 낳았다. 셀린은 종군 기자인 애인을 두고 있다. 무심한듯 서로의 안부를 묻던 둘은 9년전 하룻밤 속으로 다시 빨려들어 간다.

또 한번 이별의 순간이 다가오는 자동차 안에서 “그날 밤 모든 사랑을 쏟아내버려 이제 사랑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하며 셀린은 고통스러워 한다. 제시는 “결혼식 직전에도 당신을 떠올렸다”며 함께 아파한다. 오랜 세월을 삼켜 내고서야 곁에 서게 된 둘은 9년 전 젊음이 그랬듯 재회를 확신하는 이별에 선뜻 몸을 맡기지 못한다. 제시는 시계를 번갈아보며 “조금만 더….”를 몇번이고 내뱉으며 이별을 지연시킨다. 그러면서 "기차역에서 당신이 나를 외면하고 지나치는 꿈을 꾼다"며 9년간 이어진 악몽을 들려준다. 그리고 마침내 들리는 셀린의 노래. “그대에겐 하룻밤의 추억이었을지 몰라도 내게는 소중했던 시간. 그날은 나의 전부랍니다. 그런 사랑은 처음이었지요.”

입밖으로 내뱉은 낭만의 말은 사랑을 들뜨게 하지만, 결국 사랑을 지탱하는 건 심장으로 삼켜낸 연민일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말줄임표처럼 미처 내뱉지 못한 사랑의 말은 연민의 가슴으로 대신 남아 따스한 온기를 유지한다. 사랑이란 격정적일 때 가장 또렷할 테지만, 해질 무렵 느릿느릿 늘어지는 노을처럼 따뜻한 연민이 없고서야 그 사랑의 견고함을 따지긴 어려울 테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이렇다. 연민인듯 사랑인듯 9년의 세월을 훌쩍 흘려보낸 둘은 셀린의 방안에 있다. 시간은 째깍째깍 흐르고 비행기 시간은 다가온다. 니나 시몬의 노래에 몸을 흐느적대던 셀린이 말한다. "자기, 이러다가 비행기 놓쳐." 피식 웃으며 제시가 던지는 대답. "알아" 제시는 결국 셀린의 방에 남았을까. '우-우-' 바람 소리에 창문이 들썩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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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에도 살이 붙는가. 부쩍 내 눈물이 무거워졌다. 뺨을 따라 천천히 흐르는 법이 없다. 눈가가 촉촉해지는가 싶으면 그대로 후두둑 떨어지고 만다. 나이가 들면 눈물의 저울추도 기우나보다. 더구나 요사이 눈물의 양도 눈에 띄게 늘어 당혹스러울 때가 많다. 어릴적 찰랑이던 내 눈물샘이 첨벙대는 소리로 가득찬다.

눈물의 고삐가 풀려버린 건 그 장면에서였다. 시즈루와 마코토의 키스. 수년간 그를 마음 속 깊이 품었던 여자 ‘아이’는 사진 콘테스트에 도전하겠다며 그와의 키스를 제안했다. 사랑을 하고 성숙할수록 죽음에 가까워지는 아이가 제 삶의 방향을 정한 것이다. 사랑을 향해 뚜벅뚜벅, 죽음을 향해 성큼성큼. 눈먼 키스를 나누며 마코토는 비로소 시즈루가 자신의 심장에 들러붙었음을 깨닫는다. 떠나는 그의 등에 대고 시즈루가 말한다. “방금 키스에 조금은 사랑이 있었을까”

이 말은 시즈루가 마코토에 건넨 마지막 말이 됐다. 사랑을 택한 시즈루는 아이의 티를 벗고 여인이 됐으며, 뉴욕을 홀로 떠돌다 죽음을 맞는다. “사랑하면 죽는 병”이라고 했던 시즈루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죽은 시즈루의 뉴욕 사진전에는 둘의 키스가 담긴 사진이 눈부시게 내걸렸다. ‘생애 단 한번의 키스, 단 한번의 사랑’이란 문구와 함께. 사진 앞에 넋을 놓아버린 마코토는 3년전 "조금은 사랑이 있었을까"라고 물은 시즈루에 나즈막히 답한다. “있었어. 조금이 아니었어. 너는 내 세상의 모든 것이었어.”

선뜻 손 내밀지 못한 사랑은 다만 아픈 것인가. 후두둑 쏟아져버린 눈물을 해독하는 데 제법 시간이 걸렸다. 시즈루와 마코토의 '단 한번의' 키스는 엇갈려버린 운명에 대한 애린만을 머금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그 지독한 운명 앞에 그저 꺼이꺼이 울어버려야 하는 걸까. 그러나 영화는 꽃피기 직전 아름답게 몽우리져버린 것도 사랑이라 말한다. 망자가 돼버린 시즈루의 사진전에서 발길을 돌리며 마코토는 활짝 웃어보인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50통이나 되는 시즈루의 편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후 일본으로 한통씩 배달되는 죽은 시즈루의 늦은 편지. 제 심장에 박힌 시즈루를 느릿느릿 끄집어내며, 그는 채 피우지 못한 제 사랑을 소중히 감싼다.

사랑하고 이별하는 일은 아마도 우리의 의지와 별 상관없이 벌어지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의지가 사랑을 넘볼 여지는 단호하게 없다. 의지가 사랑을 키우거나 소멸시키는 것도 아니다. 사랑이란 ‘다만’ 사랑하는 것이다. 시즈루가 마코토의 연인이었던 미유키에게 손을 내밀 듯. 그래서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고 싶었을 뿐"이라며 제 사랑의 아득한 깊이를 고자질하듯. 그렇게 ‘다만’ 빠져드는 것이 사랑이다. ‘다만, 널 사랑하고 있어’란 영화의 제목은 그래서 사랑에 빠진 모든 연인들의 ‘신앙고백’이어야 한다. 사랑의 강물 아래로 빠져든 이들은 다만 껴안고 사랑해야 한다. 그 강물이 어느 순간 물길을 돌릴지, 아니면 망망대해로 흘러들지 우리로선 속수무책이다. 사랑은 그토록 속수무책인 것이라서 다만 아름다운 것인가보다. 내 무거운 눈물이 재잘대는 소리를 이제는 알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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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삶이 투옥될 때 영웅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감옥 문을 나설 때, 등 뒤에서 철문이 닫히고 일상으로 뛰어드는 순간 비로소 영웅의 삶이 작동한다. 땀과 피로 얼룩진 일상을 견뎌내는 자. 그가 바로 영웅이다. 일상을 견뎌내기란 쉽지 않다. 일상은 대개 불확정적이어서 무서운 것이기 때문이다. 서서히 침몰하거나 가만히 떠오르는 무수한 일상(들)의 집합이 곧 삶이다. 그 일상을 묵묵히 견뎌낼 때 이 땅의 모든 ‘장삼이사’는 영웅이 될 수 있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그런 영웅들의 이야기다. 일상을 견디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쥐어 짜낸 여성들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더구나 영화는 여자 핸드볼 선수라는 ‘마이너리티’의 ‘마이너리티’를 전면에 내세웠다. 자본의 잔치로 전락한 스포츠의 변두리를 서성대는 핸드볼. 그 작은 공으로 밥벌이를 하는 여성들. 그들은 가슴 아릴 만큼 팍팍한 일상을 견뎌낸다. 일상을 견뎌낸 모든 인간은 영웅의 칭호를 받을 수 있음을 영화는 또박또박 말해준다.

영화는 여성들의 새떼 울음같은 소리로 시작한다. 타이틀이 채 모습을 드러내기도 전에 여자 핸드볼 선수들의 소프라노 톤 구호부터 들려온다. 대부분 힘을 내자는 “화이팅”이거나 공을 달라는 “여기”와 같은 소리다. 그러나 그 모든 소리는 “언니”란 말로 뭉쳐 들리기도 한다. ‘언니’란 우리말은 여성들 사이의 관계를 드러내는 일상어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 목소리에 실린 “언니”란 말은 그래서 이 영화가 우리 주변의 평범한 여성-언니에 주목하고 있음을 또렷이 알려준다.

영화에서 핸드볼은 다양한 처지의 여성-언니들을 동그랗게 엮어내는 매개로 그려진다. 일곱 여성들의 일곱 빛깔 일상은 코트 위에 흩뿌려진 땀 속에서 무리 없이 하나로 뭉쳐진다. 코트 위 여성들 사이를 오가는 공은 그들의 사연 많은 일상과 일상을 교감하게 한다. 남편 빚을 갚고자 공을 다시 잡은 미숙(문소리)과 젊은 날 실패했던 사랑을 감독으로 마주치게 된 혜경(김정은), 그리고 남편의 사랑을 받지만 코트에선 늘 뒷전에 물러나 있던 정란(김지영)은 동그란 공을 주고받으며 소통한다.

영화는 이들의 소통이 숨가쁘게 오가는 현장을 따라간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이 그 무대다. 스스로의 일상을 견뎌낸 여성들은 지중해 너머 승전보를 날려온다. 하지만 일상을 견뎌낸 대가가 꼭 객관적 지표로서의 ‘성공’일 까닭은 없다. 자신의 일상 앞에 당당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것이 마이너리티의 일상이었다면 더욱 그렇다. 소외된 일상을 묵묵히 견딘 자. 그가 영웅이다. 미숙이 남편의 자살 기도 소식을 들은 직후 “그 인간 약 먹는 타이밍 하고는….”하고 심드렁하게 내뱉을 때, 결승전을 앞두고 의식 잃은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나 포기 안해”라고 말한 뒤 코트로 돌아올 때, 우리는 이미 영웅의 모습을 감지한다.

익히 알고 있듯(실화가 이야기의 밑그림이므로) 코트 위 여성-언니들은 결승전에서 좌절한다. 마지막 순간에 무너진 미숙의 얼굴을 프레임 밖으로 밀어낸 건 영웅의 좌절을 감추기 위함이 아니다. 미숙의 얼굴이 빠진 프레임 안에서 한쪽은 뛸 듯 기뻐하고 다른 한쪽은 털썩 주저 앉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서서히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는 미숙의 얼굴. 얼굴을 무너뜨리며 우는 미숙의 얼굴 위로 이야기의 실제 주인공들의 얼굴이 겹쳐진다. 그러나 온몸의 진액을 짜낸 듯한 실제 여성-언니들의 얼굴은 실패의 그늘에 가려져 있지 않다. 눈물과 땀으로 범벅된 그들의 얼굴은 마침내 지독한 일상을 견녀냈음을 안도하는 표정이다.

여성들의 새떼 울음같은 소리로 시작한 영화는 한 남성의 잦아드는 울음 소리로 마친다. 아테네 올림픽 결승전에서 패한 직후 임영철 감독의 모습이다. 그는 “어떻게 한 나라를 대표한다는 선수들이 돌아갈 팀이 없느냐. 우리 선수들이 훈련할 때….”라고 말하다 울음을 터뜨렸다. 그가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을 비추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줄임말로 ‘우생순’이라 불린다. 그런데 ‘우생순’은 어쩐지 한 평범한 여성의 심심한 이름처럼 들리기도 한다. 임영철 감독은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그 우생순 들과 피와 땀을 함께 적셨으리라. 여성의 삶에 대해 고뇌하며 눅눅한 밤을 지샜으리라. 그의 울음이 우리 주변의 수많은 우생순을 가슴으로 이해하게 된 남성의 울음처럼 들리는 건 그래서다. 하여 영화는 여성의 일상을 묵묵히 견뎌내고 있는 이 땅의 우생순 들에게 말을 건다. 그러면서 남성들에게 그들을 주목하라고 주문한다. 남편 빚에 시달리는 ‘우생순’을, 비정규직에 목을 매달고 생계를 잇고 있는 '우생순'을, 소외된 곳에서 소외된 일상을 견디는 무수한 ‘우생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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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은 동물의 보편적인 생명 활동이다. 눈을 뜨기 위해 눈을 감고 사지의 활동을 잠시 멈추는 일은 신의 시혜이고, 자연의 섭리이다. 잠을 통해 동물은 육체의 쉼을 누리고 그로써 생명을 이어간다.

잠을 잘 때 가장 큰 변화를 보이는 신체 기관은 눈이다. 눈을 덮었다 열었다 하는 눈꺼풀은 세계와 자아 사이에 걸친 막이다. 우리는 눈꺼풀을 내림으로써 세계와 단절된다. 그러고 보면, 눈은 잠의 시작과 끝에 깊이 관여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인 셈이다. 눈꺼풀이 내리면 세계가 닫히고, 눈꺼풀이 오르면 세계가 열린다. 眠이 目(눈)을 취해 이루어진 글자인 것도 그런 까닭일 게다.

目(눈)에 民(백성)을 더하면 眠(잠)이 된다. 여기서 目은 뜻에 해당할 것이고, 民은 음에 해당될 터이다. 그래서 眠은 형성문자라 분류하는 편이 자연스럽다. 뜻과 음이 만나 형성된 글자라는 말이다. 그런데 글자의 모양새를 가만히 보면, 반드시 그렇게만 볼 것도 아니다. 目은 흡사 베개의 모양을 본뜬 듯해서, 사람(民)이 베개를 베고 누운 모습 같다. 그래서 眠을 상형문자라 우길 수도 있을 터이다. 어차피 그 기원을 정확히 밝힐 수 없는 바에야, 한 글자의 뿌리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도 생각할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혹 상형문자라면, 目 옆으로 人이 아니라 民을 둔 것은 왜일까. 人이 보다 개별적인 사람을 뜻한다면, 民은 무리지은 사람들, 즉 보편적인 사람들을 지칭한다. 따라서 目과 民의 만남은, 사람이면 누구나 잠을 자고, 또 그래야만 사람이 사람일 수 있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닐까.

그러므로 不眠은 사람의 생명 현상에 역행하는 것이다. 일순간에 모든 것을 멈춰 세우는 것만큼 자연에게 이로운 것은 없다. 사람도 자연의 일부일 터이므로, 하루에 예닐곱 시간 잠시 멈추는 것은 필수적이고, 또한 보편적인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에게 그것은 더 이상 보편적이지 못하다. 不眠에 시달리면서,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이다.

不眠은 물론 생명 현상에 반하는 현상일 테지만, 역으로 가장 생명 현상에 가까운 것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현대인의 不眠이란 살아남지 못할 것에 대한 不安의 소산이고, 따라서 그것은 생명에의 욕망을 가장 강렬한 형태로 표현하는 것일 수도 있다. 살아야 한다는 맹사적 욕망! 거기에는 잠을 죽음의 메타포로 받아들이는 인간의 보편적인 트라우마가 작용하는지도 모른다.

不安에 시달리는 사람은 不眠에 이르고 不眠은 다시 不安을 낳는다. 不安은 不眠과 熟眠을 가르는 실질적 힘이다. 내가 잔다기보다는 不安이 나를 잠들게도 하고, 또한 잠을 교란시키기도 한다. 그래서 不安은 현대인의 생명을 지속적으로 통제하고 위협하는 주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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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혼

외로움이
그리움이
삶의 곤궁함이 폭포처럼 쏟아지던
작은 옥탑방에서도
그대를 생각하면
까맣던 밤하늘에 별이 뜨고,
내 마음은 이마에 꽃잎을 인
강물처럼 출렁거렸습니다.

늦은 계절에 나온 잠자리처럼,
청춘은 하루하루 찬란하게 허물어지고,
빈 자루로 거리를 떠돌던
내 영혼 하나 세워둘 곳 없던 도시에,
가난한 시인의 옆자리에
기어이 짙푸른 느티나무가 되었던 당신.

걸음마다 질척이던
가난과 슬픔을 뒤적여,
밤톨같은 희망을 일궈주었던 당신.
슬픔과 궁핍과 열정과 꿈을
눈물로 버무려 당신은 오지 않은
내일의 행복을 그렸지요.

그림은 누추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눈이 시렸을 뿐!
수 많은 기억들이 봄날의 벗꽃처럼
흩날려버릴 먼 훗날,
어려웠던 시간, 나의 눈물이
그대에게 별빛이 되고 나로 인해
흘려야했던 그대의 눈물이,
누군가에게 다시 별빛이 될 것입니다.

가을을 감동으로 몰고가는
단풍의 붉은 마음과 헛됨을 경계하는
은행의 노란 마음를 모아,
내 눈빛이 사랑이라는 한마디 말도 없이,
그대의 마음 속으로 숨어버린 그 날 이후,
내 모든 소망이었던 그 한마디를 씁니다,

저와 결혼해주시겠습니까!

푸른 하늘에 구름을 끌어와,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그대의
사랑에 대하여 쓰며 천사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날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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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영 시인이 아내 고민정 아나운서에게 낭독했다는 시.
환멸을 견디기 힘든 날들이 이어질수록 걸쭉한 사람 냄새는 심란한 가슴 한 구석을 마구 간지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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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란 국호는 어색하다. ‘민주주의’란 말 때문이다. 북한 정권 수립자들의 야심찬 ‘민주기지론’에도 불구하고 이 체제가 민주주의에 가까웠던 적은 없다. 오히려 이 숨막히는 체제는 냉전 시대를 관통하며 남한의 지배 세력-곧 반민주세력-을 공고히 하는 데 손을 뻗었다. '반공'이니 '북괴'니 하는 프로파간다에 적절히 이용된 것이다. 주체 사상이란 요상한 이론으로 민족민주 세력을 파고들면서 남측의 정당한 민주화 운동에 어깃장을 놓은 것도 북한 체제의 작품이다.

더욱 아연한 것은 환갑을 바라보는 북한 체제의 오늘이다. 경제 사정이 최악이라는 풍문은 아득한 레파토리다. 보다 심각한 것은 민주주의 정신을 대놓고 부정하는 기형적인 정치 체제다. 오늘 북한은 김정일 정권의 왕국이자 봉건 체제이며, 흘러간 전체주의 국가의 전형이다. 인간의 내밀한 개인성을 깡그리 무시하는 정치 체제를 민주주의라 부를 순 없을 테다.

개인성을 질식시키는 이 체제가 남한의 민주 세력에 의해 옹호받아 온 것은 기이한 일이다. 사실 지금껏 진보 진영에서 북한 체제 비판은 촌스런 반민주 행위처럼 여겨져 왔다. 근거는 ‘내재적 접근방법’이란 온정주의다. 북한 정권을 특수한 역사적 배경과 객관적인 국제 질서를 바탕에 깔고 이해하자는 주장이다.

언뜻 그럴듯해 보이는 이 ‘따스한 이론’은 역설적으로 가장 포악한 정권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돼 왔다. 민족민주 전선에 살을 맞대고 있던 남측의 진보 세력은 이 이론을 핑계 삼아 북한의 반민주적 정치 체제와 북한 인민 일반을 구별짓는 노동을 게을리 했던 것이다. “북한을 이해하고 돕자”는 도덕적으로 정당한 주장은 그러나 반인권적인 김정일 정권을 유지케 한 비도덕적 결과를 낳았다.

북한의 핵 실험으로 국제 정세가 뒤숭숭하다. 진보 진영은 “모든 게 미국 탓”이라는 안전한 주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이 주장에 일리가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 지독히 너그러웠던 이들이 미국에만 화살을 돌리는 건 온당치 못하다. 그들의 무책임하고 위선적인 대북 온정주의가 북한 인민들을 핵 폭풍 속으로 밀어 넣는데 일정하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도대체가 한 개인의 인간성을 껌 버리듯 하는 정치 체제에 대해 제대로된 비판 한번 하지 못하는 까닭을 나는 알 수 없다. 박정희 유신 체제에 거품을 무는 사람들이 북한식 전체주의에 대해 입을 다무는 이유는 무엇일까. 북한을 따스하게 바라보는 어떤 이들도 지금의 북한 체제에 정착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테다. 그것이 북한 체제를 바라보는 솔직한 자세다.

북한 정권에서 북한 민중들을 떼어놓을 때 비로소 제대로 된 대북 정책이 작동한다. 북한 정권을 자극할 수 있다는  ‘친절한’ 우려 때문에 오늘도 북한의 인권은 쓰레기 더미에 파묻히고 있다. 애초 의도야 어떻든 포용 정책은 남측의 한 자본가와 최고 권력자가 손잡은 결과 탄생했다. 그들은 각기 다른 계산에 따라 북한 인권을 모른 척 해온 ‘온정주의’로 일관했다.  

그 따스한 정책에 대해 오늘의 위기를 전부 책임져야 한다고 말하고 싶진 않다. 다만 그 정책이 북한 정권과 인권의 경계를 철저히 뭉개왔다는 것만은 지적하기로 하자. 북핵 위기란 것도 실은 ‘집단적 디스토피아’를 유지하고픈 북한 정권의 작품이란 것도 분명히 하자. 북한 인권을 말하지 않고 핵 문제를 풀 순 없다. 개인성을 짓누르는 정치 체제를 뒤집지 않고선 '조선'에 ‘민주주의’란 말을 함부로 붙여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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