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 에 해당하는 글 : 14 개
2009/01/11 :: 왕처럼 화내라 (1)
2008/09/01 :: 개밥바라기 별 (2)
2008/07/19 :: 교감
2008/05/14 :: 엘리아의 제야
2008/02/09 :: 무늬
2008/01/12 :: 행복한 책읽기
2006/10/01 :: 수상한 식모들
2006/09/16 :: 탐독
2006/05/28 :: 축구의 사회학
2006/05/11 :: 노동의 미래
2006/05/11 :: 거세된 희망
왕처럼 화내라
크리스토프 부르거 지음, 안성철 옮김
미래인, 328쪽, 1만2800원

분노란 말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감각되지 않는다. 어떤 이에겐 무작정 삼켜야 할 것이며, 또 다른 이에겐 덮어놓고 터뜨려야 할 어떤 것이다. 저자는 그러나 분노란 말의 아슬아슬한 경계에 주목한다. 무턱대고 참아서도 대책 없이 발끈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한다. 심리 트레이너인 그에게 분노란 열정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이 책은 들끓는 분노를 삶의 에너지로 전환시키는 방법에 대한 친절한 안내서다. 저자는 불끈 솟아나는 분노의 감정을 적절히 활용하라고 권한다. 분노를 효율적으로 변주하면 일이나 인간관계에서도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저자는 분노를 다스린다는 뜻에서 ‘분노 대왕’이란 비유적 표현을 끌어온다. 또 분노를 마구잡이로 터뜨리는 ‘폭군’, 분노를 꾹 누르고 사는 ‘물러난 왕’ 등으로 유형을 나눈다. 폭군처럼 화를 조절하지 못하면 주변과 마찰을 일으킨다. 분노를 억압하는 물러난 왕에겐 에너지가 없다. 그러나 분노 대왕처럼 분노의 에너지를 긍정적으로 제어한다면 늘 주변을 장악하고 살아갈 수 있다는 얘기다.

분노를 성공의 이음매로 활용한 유명 인사들의 실화도 담겼다. 당겨쓰면 이런 이야기다. 1958년 뮌헨에선 독일 축구의 역사를 뒤바꿀 한 소년의 분노가 폭발한다. ‘TSV 1860 뮌헨’에서 뛸 예정이었던 소년은 이 팀의 한 선수에게 따귀를 맞았다. 분노한 소년은 ‘FC 바이에른 뮌헨’으로 팀을 옮겼다. 훗날 독일의 축구 황제로 불린 프란츠 베켄바우어 이야기다. 저자는 이 일화를 분노가 결심을 부르고 열정적인 행동으로 이어진 대표 사례로 소개한다.

‘책 속의 책’을 끼워 넣은 것도 흥미롭다. 장과 절을 넘어갈 때마다 ‘분노 나라’ 이야기가 나온다. 이론적 설명과는 별도로 ‘분노 나라’의 왕이 분노의 긍정적 힘을 발견해가는 한 편의 옛날이야기가 전개된다. 분노에 대한 짧은 메시지인 ‘왕을 위한 계명’ 182가지도 곳곳에 나열돼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다.

추락하는 경제 탓에, 텅 빈 지갑 탓에, 밀려난 직장 탓에 이래저래 분노할 일 많은 시절이다. 오늘도 덜 삭은 분노가 슬금슬금 피어오르고 있다면 서둘러 이 책을 펼쳐볼 것을 권한다. 분노는 고통의 신호이자 열정의 에너지다. 이 에너지를 억압하는 대신 긍정적 힘으로 전환시킨다면 고통의 시절도 거뜬히 넘길 수 있지 않을까. 부글부글 끓는 분노는 인간이 지닌 가장 순수한 형태의 에너지인 것이다.
  
문득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던가 싶은 때가 있다. 너저분한 정치 언어에 휩싸여 하루를 탕진하는 요즈음이 그렇다. 내게 추악한 정치 언어는 가깝고, 매끈한 문학 언어는 아득하기만 하다. 대부분의 시간을 악취나는 정치 현장에서 허우적대는 나는, 고백컨대, 단 한줄의 문학도 속시원히 소화하지 못한다. 허기진 감성으로 문학을 뒤적여도 화사한 문학 언어는 내 가슴 어딘가에서 턱, 걸려버리곤 했다.

고향 길에 집어든 『개밥바라기별』은 그런 점에서 낯설었다. 내게 일단의 문학적 감성이라도 남아있었던 걸까. 그 전부를 소진해버린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술술 읽혔다. 황석영의 투박한 문장이 가슴을 울렁이게 한 적은 처음이었다. 그의 따옴표도, 느낌표도, 말줄임표도 내게 지극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왔다.

물론 그의 문장이 돌연 미끈해진 탓은 아니었을 게다. 소설 곳곳에서 여전히 덜컹대는 그의 문장과 마주하곤 했기 때문이다. 내 가슴을 달음박질하게 했던 건 외려 그의 매력적인 캐릭터들이다. ‘유준’이란 인물 위에 포개진 그의 청소년기가 그랬고, 일체의 사회적 질서에 침을 내뱉던 그의 벗들이 그랬다. 시험 기간을 거치면 죄다 사라져버리는 지식 대신 살아서 꿈틀대는 지혜를 찾겠다며 유준이 자퇴서를 내던질 때, 그와 벗들이 무전 여행으로 전국을 훑을 때, 나는 내 안의 원망공간(願望空間)을 끄집어 내는 전율을 경험했던 것이다.

인간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질서 속에서 안온할 테지만, 그 질서 안에 갇힐 때 온전하지 못할 테다. 견고한 질서에 맞섰던 유준과 그 벗들의 소년기가 눈부신 건 그래서다. 황석영은 ‘작가의 말’에서 “하고픈 일을 신나게 해내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태어난 이유”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너희들 하고 싶은대로 하라고 끊임없이 속삭이면서 다만 자기가 작정해둔 귀한 가치들을 끝까지 놓쳐선 안 된다”고 나즈막히 일러둔다.

하고픈 일을 신나게 하지도, 작정해둔 귀한 가치들을 고집스레 지키고 있지도 못한 오늘, 마음이 가난한 어느 해질녘 ‘개밥바라기 별’과 마주친다면 다만 목놓아 울어버릴 것 같다. 그 어느 때보다 나를 둘러싼 온갖 질서에 질식할 것만 같아서다. 소설에서 유준은, 아니 젊은 시절 황석영은, 일용직 노동자로 전국을 떠돈 일이 있다. 한일협정 반대시위로 끌려간 유치장에서 만난 깡다구 넘치는 한 노동자를 따라서다. 그 노동자의 농익은 한 마디는 그의 젊은 시절을 출렁이게 했다. “사람은 씨팔 ... 누구나 오늘을 사는거야”

그 오늘을, 작정해둔 귀한 가치를 따라, 하고픈 일을 신나게 하며 보낼 순 없을까. 서른을 훌쩍 넘기고서도 개밥바라기 별처럼 불안한 빛줄기만 새어나오고 있는 내 젊음이 한심스러워 하는 말이다.
  
시집은 대체로 얇다. 헌데 그 얇은 시집을 읽어내기란, 가슴으로 이해하기란 여간 힘들지 않다. 대부분의 텍스트는 머리의 이해를 기대하지만, 시는 다르다. 머리와 가슴이 함께 이해해야 시인의 손끝에서 떨리던 감성이 비로소 전해온다. 그래서 시를 이해하는 일은 적이 부담스럽다. 내가 이해라고 믿더라도 실은 오해일 가능성이 크다. 해서 다짐했다. 이해 대신 오해하기로. 이해란 가장 잘한 오해이고, 오해란 가장 적나라한 이해라고 하지 않던가.

그런데도 부담은 쉬 가시질 않는다. 멋부리는 오해라도 하기 위해선 흩뿌려진 시어를 머리 싸매고 꿰맞추는 노력이 앞서야 하는 까닭이다. 쉽게 말해 이를 악 물고 덤벼들지 않아선 그럴듯한 오해도 하기 힘들다. 그런데 어떤 시들은 가만히 읽기만 해도 그 감성이 전해오는 경우가 있다. 어이, 그냥 읽기만 해, 덮어놓고 문장에 가슴을 맡겨버려, 이런다. 홀가분하고 나른해진다.

그런 시는 대개 짧은 편이다. 감성이 돌아다닐 공간이 좁아서인지 모른다. 짧은 시편에 빼곡히 감성을 담아 놓아서인지 모른다. 그런 시는 또 이렇기도 하다. 요란한 세상에서 한발 비켜 서 있다. 아니, 요란한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 이면을 그린다. 누구도 주목하지 못했던 외딴 곳에서 지극히 서정적인 풍경을 길어낸다. 정현종의 다음 시편처럼.

교감

밤이 자기의 심정처럼
켜고 있는 街燈
붉고 따뜻한 가등의 정감을
흐르게 하는 안개

젖은 안개의 혀와
가등의 하염없는 혀가
서로의 가장 작은 소리까지도
빨아들이고 있는
눈물겨운 욕정의 친화

그렇잖아도 감성이 뛰어놀 공간이 좁은 마당에, 세상의 외진 곳이 그려내는 교감의 풍경이라니. 가슴이 흐르는대로 문장이 흐르는 그런 시는, 행복해라, 인간의 섬세한 감성이 빚어낸 꿈의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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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소설집 <엘리아의 제야>(문학과 지성사, 2003)를 재독하다.

앞질러 말하자면, 나는 꽉 짜여진 소설을 좋아한다. 김승옥, 오정희, 이인성 들의 소설이 그렇다. 그들의 소설은 대개 문장과 문장 사이가 치밀하며, 온갖 상징들로 질퍽해 읽기가 여간 녹록치 않다. 하지만 희뿌연 문장들을 어렵사리 헤치고 나오면, 흐릿하나마 견고한 소설의 구조와 마주치게 된다. 그 만남의 과정은 대체로 지난하지만, 문학이 일종의 유희라고 믿는 나는, 그‘고통의 향유’를 긍정하는 편이다.


나는 저널리스트 고종석과 에세이스트 고종석의 팬이지만, 소설가 고종석에겐 시큰둥한 편이다. 그의 소설엔 내가 앞질러 말한 ‘짜여짐’의 미학이 빠져있는 탓이다. 김훈을 제외하자면, 당대 최고의 미문가(美文家)라 불릴 만한 그이기에, 소설 위로 자유로이 흩뿌려진 문장은 눈부시게 아름답다. 그러나 그 문장들은 다만 아름답게 버려져 있어 하나의 견고한 구조를 빚어내지는 못하는 듯 보인다. 우리 문단에서, 그의 개별 문장이 지닌 독특한 지위에도 불구하고, 그 문장이 쌓아올린 소설의 구조가 문단의 장삼이사들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은 그래서다.

이 소설집도 마찬가지다. <엘리아의 제야>는 여섯 편의 중단편으로 묶인 에세이 형식의 소설집. 두 편을 제외하곤 ‘나’가 화자라는 점에서, 그리고 바로 그 ‘나’가 작가 고종석과 여러 번 겹친다는 점에서 에세이에 보다 가까운 소설들이다. 작가는 소설에서, 제 삶의 진국에 허구의 물을 마구 탄다. 툭툭 내뱉 듯 던지는 문장들은 군더더기 없는 미문들로 촘촘히 늘어서 있는데, 삶과 허구의 경계를 효과적으로 뭉개고 있다. “고종석은 박태원ㆍ최인훈 등 지식인으로서의 자질과 현실에 대한 성찰에 자유로운 서술적 문체를 특징으로 하는 ‘에세이 소설’의 전통을 잇고 있다”는 김병익의 진단은 그래서 옳다. 그러나 그 옳음에도 구멍은 있다.

구멍은 대개 소설의 헐거운 구조에서 비롯된다. 그의 지난 소설집 <제망매>에서부터 되풀이되는 ‘누이(들)’의 이미지는 지겹고, 때로 안이해 보인다. ‘나’가 중심화자가 되어 회상을 마구 풀어놓는 소설의 형식도 상투적이긴 매한가지다. 가령, 소설집의 꽁지에 실린 ‘카렌’을 보자. ‘카렌’에서 주인공 ‘나’와 아내 ‘화련’의 회상은 점프를 거듭하며 교차한다. 게다가 전라도 이야기며, 외국어 이야기로 회상이 자리를 바꾸어 앉기도 한다. 그 자유로운 회억의 과정을 “기억의 흐름을 거슬러 오르는 인간에 대한 품위와 연민을 담은”것으로 치켜세우는 이들도 있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은 소설의 구멍난 구조에 다름 아니다. 각각의 회상이 계산된 방식으로 교차하는 것이 아니다보니, 이런저런 잡담이 나열된 듯한 느낌마저 든다. 더구나 아내(화련)를 경상도 출신으로, 화자인 나(진우)를 전라도 출신으로 설정한 것도 적잖이 식상해 보인다. 소설을 ‘동서화합’으로까지 확장할 까닭도 없거니와, 그게 아니라면 굳이 소설의 많은 부분을 경상도와 전라도에 관한 회억으로 덧칠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하나 더. 이 소설집에서 변주되는 무수한 ‘나(들)’는, 다소 억지를 부린다면 단 하나의 ‘나’로 구겨넣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경제적으로 중산층이며, 어느 한 곳이 불완전한 남성이다. 직업은 기자이거나 시인 혹은 무직자이면서 ‘지식인’의 탈을 쓰고 있다. 그는 “누군가의 가랑이 밑을 지나(p.32.)”진 않았지만, 유약하고 심약한 룸펜으로 그려진다. 김병익의 옳은 지적처럼, 이는 지식인 소설의 한 전형이라 볼 수도 있겠으나, 나는 사회적 소수파를 옹호하는 개인주의자 고종석이 전형적인 지식인 소설을 생산하는 일이 불편하다. 그라면, 고종석이라면, 가질 만큼 가졌다는 중산층 지식인들이 세상을 내버리며 한탄조의 술잔을 기울이는 소설의 표정이 사회적 소수파들의 얼굴을 찌푸기게 할 것이라는 것쯤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으리라. 그가 혹 “소설 창작에 훌륭하게 성공”하기를 바랐다면, 스스로의 눈을 사회적 소수파에게로 바투 맞추는 일에도 바짝 신경을 기울었어야 했다.

이처럼 소설집엔 이런저런 구멍들이 나있고, 때문에 소설가 고종석에게 후한 점수를 주기란 곤란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나는 “이 소설집에서 건질 것은 고종석의 미문(들) 뿐이다”라고 선언하지 못한다. 그의 소설에 담긴 어떤 진실들은, 내 삶을 두어 번 곱씹게 하고, 그로써 가슴 찡한 문장 한 두 개를 새겨주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아빠와 크레파스’의 경우가 그렇다. 소설집에 실린 여섯 편의 소설 가운데 나는 ‘아빠와 크레파스’를 가장 잘 된 소설이라 평하는데, 그 구조야 어찌됐건 맨 마지막 문장이 내 눈물을 훔쳐냈기 때문이다. 문장을 그대로 옮긴다: “무엇보다도, 낙관과 자족이 중요합니다. 신이, 누구한테서든, 아무것도 남겨놓지 않고 몽땅 빼앗아가버리는 경우는 없습니다.”(p.169)

K.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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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에 기대어 질문 하나. 경제성장이 안 되면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이 부정 의문문에 단호하게 ‘그렇다’라고 답한다면, 이 책을 찬찬히 읽어볼 것을 권한다. 난삽한 개념 하나 없이도 자본주의의, 특히 신자유주의의 모순 덩어리를 효과적으로 까발리고 있다. 책은 엉성한 문장들의 행렬처럼 보이지만, 누런색 재생 종이(녹생평론사의 책이 짚단처럼 가벼운 이유다)에 담긴 지혜는 백만번이라도 곱씹어볼 만한다. “경제를 살리겠습니다”라는 구호로 대통령을 거저 먹을 수 있는 시대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경제 발전’의 이데올로기는 사람들의 ‘불안’을 재료 삼아 작동한다. 인간 일반을 ‘노동자-소비자’로 가둔 것은 20세기 들어 훌쩍 커버린 자본주의의 작품이다. 죽어라 일하지 않으면 소비할 수 없으리란(풍요롭지 못하리란) 불안감이 이 사회를 지탱하는 힘이다. 경제성장이 곧 지구를 파멸하는 일이며, 인간성을 말살하는 일이란 건 이제 교양인의 상식이지만 결코 ‘표면의 상식’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극단의 소비가 우리의 목을 겨누고 있다는 사실도 짐짓 모른체 한다. 우리의 목줄을 쥔 자본이 그렇게 한다. 자본은 증권 시황 읽듯 죽어라 ‘경제를 살리자’고 외쳐댄다. 그것이 가멸찬 착취와 적절한 이윤을 합리화해주기 때문이다.

책은 ‘제로 성장’을 예찬한다. 경제 성장을 멈추는 일이 그토록 끔찍한가. 그럼 잠시 과거를 돌아보자. 핸드폰도 자동차도 컴퓨터도 없던 시절을. 그 시절에도 우리에겐 웃음이 있었고, 더 큰 행복이 있었다. 그런 물건에 대한 필요성을 느낄 수 없으니 소비 욕구도 없었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인간에겐 ‘임금 노동’ 역시 낯선 제도였다. 유럽이 식민지 건설에 열을 올릴 때 가장 애먹었던 일이 이 부분이라고 한다. 돈을 주며 아무리 일하라고 해도 현지인들은 하루쯤 일하곤 안 나온다는 것이다. 이미 필요한 것을 살 만큼의 돈을 구했기 때문이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같이 일한다는 건 그들로선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더글러스 러미스는 ‘대항발전(counter-development)’이란 개념을 제안한다. 인간사회에서 경제 요소를 줄이고, 경제 이외의 인간활동과 시장 이외의 모든 즐거움과 문화를 발전시키자는 뜻이다. 교환가치가 높은 것은 줄이고 사용가치가 높은 것은 늘리자는 제안이다. 쉽게 말해 노동자-소비자의 굴레를 벗고 하기 싫은 일은 줄이고, 하고 싶은 일은 늘리자는 거다. 경제성장을 지속적으로 하지 않아도(아니 하지 않아야) 환경은 보존되고 인간은 그 자체의 행복을 찾을 수 있으리란 전망이다.

성장을 멈추면 어떻게 될까. 역시 분배의 문제로 돌아온다. 흔히들 파이를 키워 나누는 게 낫지 않냐고 말한다. 거짓말이다. 주변을 둘러보라. 우리 경제의 파이는 끝없이 커져왔지만 빈부 격차는 외려 확장을 거듭하고 있다. 그러니 정책을 주무르는 자들아, 더 이상 파이를 키우자 따위의 감언이설은 하지 마라. 대신 정치 본연으로 돌아와라. 분배는 정의의 문제다. 정의는 경제의 영역이 아니다. 경제학에선 정의를 가르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회사 사장’을 대통령으로 뽑아 놓은 나라에선 정의가 앞서지 않는다. “돈을 벌지 못한 건 게으르기 때문”이란 경제학적 사고가 퍼져있을 뿐이다.

이 땅의 장삼이사들은 분노해야 한다. 나는 내 부모가 게을러서 부를 축적하지 못했다고 생각지 않는다. 문제는 더 많이 빼앗고 더 많이 착취해 우리를 노동자-소비자로 가둬두려는 부정의한 정사(政事)에 있다. 정의는 정치의 용어다. 양극화는 “경제를 살리자”는 구호로 풀리지 않는다. 그것이 심화되는 구조를 뜯어 고치는 건 정치의 영역이다. 그러므로 맥없는 시대여, 가련하다. “정치는 모르지만 경제 하나는 확실히 안다”는 대통령이 25일 취임식을 치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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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사가 환멸스러우면 자연으로 달아나기 마련이다. 눅눅한 새벽 돌연 바다가 보고 싶어지는 것도 그런 까닭에서일 게다. 미래는 캄캄하고, 현재는 고통스러울 때 나는 습관처럼 과거로 뒷걸음친다. 확실히 오늘보단 어제가 인간에 한층 더 가까운 것 같다. 지난 추억을 그렇게 극단까지 밀어붙이다 보면 우리는 자연과 마주친다. 인간도 맨 처음엔, 아니 종국엔 자연의 일부일 테니까.

이시영 시인은 아무래도 양 극단을 체험한 듯하다. 80년대를 통과하며 인간사의 잔혹함을 체험했을 그는 90년대의 문을 열며 자연으로 뒷걸음친다. 그 전환의 시기에 그의 시집 ‘무늬’가 있다. 그는 시집 곳곳에서 인간을 노래하길 멈췄음을 선언한다. 대신 인간의 자리를 자연에 내준다. 그가 인간을 노래하는 일은 “막 얼어붙은 폭포의 숨결('노래')”과도 같다. 그는 얼어붙은 노래를 자연이 해결하리라 믿는다. 그래서 “내년 봄이 올 때까지 거기 있어라. 다른 입김이 와서 그대를 녹여줄 때까지(같은 시)”라고 쓴다.

그러나 시인의 자연은 인간과 동 떨어진 세계가 아니다. 그는 차라리 자연으로 인간을 노래하는 편이다. 그가 시적 대상으로 삼은 것은 대부분 산,나무,돌과 같은 자연이지만, 결국 그의 입김은 인간에 닿아있다. 자연과 인간이 살과 살을 부비는 세계를 그는 노래한다. 그래서 자연으로 시작한 시는 인간으로 은근히 끝나곤 한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시편.

“아카시아들이 다투어 포도 위에 샛노란 꽃방석을 깔았다/아가씨들보다 아가씨들 품에 안긴 개들이 먼저 사뿐히 뛰어내린다/이런 날 아스팔트도 단 한번 인간의 얼굴을 한다”(‘풍경’ 전문)

“나뭇잎들이 포도 위에 다소곳이 내린다/저 잎새 그늘을 따라 가겠다는 사람이 옛날에 있었다”(‘무늬’전문)

시인은 자신이 줄곧 자연을 노래하는 까닭을, 그 속 사정을 보다 직접적으로 내비치기도 한다. 이럴 때 그의 노래는 포르르 내려 앉는 새들의 소리가 아니라, 오렌지 불빛 가득한 새벽녘 포장마차의 두터운 한숨 소리와 같다. 그는 자연을 잠시 내려놓고 곧장 인간으로 들어간다. 인간 본연의 세계에서 이탈해 짐승들의 세계를 살고 있을 불특정 다수를 ‘그’라 지칭하면서.

“젊어 한때 그는 제복 단추를 풀어헤치고/거리의 데모 대열에 뛰어들어 큰 소리로 외치고 싶었지만/어머니와의 약속 때문에 그것을 망설였고/늙어 한때 그는 일 속에서 빠져나와/고향의 숲길을 싫도록 걷고 싶었지만/상사와의 결재 서류 때문에 그것을 한번도 이행하지 못했다/그리고 그는 이제 늙은 퇴직자가 되어/공원의 벤치 위에 앉아 탄식한다/이것이 나의 삶이었는가” (‘그’ 일부)

“이것이 나의 삶인가” 한번쯤 자문해본 사람은 안다. 무수한 ‘그’들이 왜 데모도, 고향 숲길도 지운 채 살아야만 하는지를. 시인은 “그에게는 유난히 지켜야할 깨알같은 약속들이 너무 많았다”라고 말한다. 자연을 듬뿍 담은 이 시집은 어쩌면 그 깨알같은 약속에 제 삶을 저당잡힌 인간에 바치는 헌정시이다. 아니, 이 표현은 너무 한가롭다. 시집은 차라리 늦지 않도록 서둘러 깨알같은 약속에서 달아나라고 채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시인의 눈길은 마침내 고향에 닿는다. 유년의 맨 윗목. 인간의 얼굴로 인간의 놀이로 인간과 인간이 교감하던 곳. 그는 ”내 생애 그런 기쁜 길이 남아 있을까(‘마음의 고향4’)”라고 반문한다. “막 떠오르기 시작한 아침 해에 함뿍 젖은 아랫도리가 모락모락 흰 김을 뿜으면 빤짝이던 (…) 작은 청개구리가 영롱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팔짝 튀어 달아나던/내 생에 그런 기쁜 길을 다시 한번 걸을 수 있을까(같은 시)”라며 탄식한다.

그는 인간의 극단은 자연이며, 그 원망(願望) 공간은 고향이라고 핏대 세워 노래하는 듯하다. 자연과 인간이 버성김 없이 직조된 시는 드물다. 인간의 문제를 자연으로 풀어내는 시인의 솜씨가 어지간하다. 이 시집을 읽는 데 한 시간이면 족하다.“이것이 나의 삶인가”라는 물음이 스스로를 짓누르고 있는 이 땅의 모든 ‘그’들에게 이 시집을 권한다: 너에게 시영을 강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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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라는 이름은 예수 이후 인류사의 중량과 맞먹는다. 그가 십자가의 수난을 겪은 것은 그의 나이 33세 되던 해, 그러니까 서기 33년의 일이고, 조지 부시가 예수의 이름을 부르대며 이라크로 진격한 것은 서기 2003년이다. 인류는 예수를 둘러싼 수많은 전쟁을 치뤄내며 예수 없는 이천 년을 살아왔다. 영광의 부활을 맞이하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예수는 그 이천 년 동안, 제 이름을 둘러싼 싸움박질을 그저 관망하고 있다.

인간 영혼의 해방을 역설했다는 예수는 오늘 어디에 있는가. 그가 아버지라 부르는 하나님은 또 어디에 있는가. 유대의 족장사는 아브라함의 장자인 이스마엘에게서 아랍 민족이, 늦둥이 아들인 이삭에게서 이스라엘 민족이 뻗어 나왔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의 세계는 한 아비에게서 난 두 아들이 같은 신을 섬기면서 서로 싸우고 있는 형국인 셈이다. 하나는 야훼의 이름으로. 다른 하나는 알라의 이름으로. 이런 증오와 절망으로 가득한 세계를 두고 모든 사랑의 절대치인 예수가, 그 아비인 하나님이 왜 개입하지 않는가. 그들은 대체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단 말인가.

애석하게도 기독교인인 나는 그 답을 모른다. 아니, 알지만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 ‘안다고 믿는 것’이다. 교회 학교가 내 두뇌 깊숙이 기입해둔 성경과 교리에 관한 지식들은 그에 대한 모범 답안을 마련해두고 있지만, 나는 그것들이 인간의 이성과 불화할 것을 안다. 어떤 이성적 논리로도 설명될 수 없는 것. 우리는 그것을 일러 ‘신앙’이라 부른다. 치밀한 논리로 논증되지 않는 지식은 ‘과학’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다. 때문에 신앙은 과학적 논증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내 평소의 생각이다. 그러나 내 안에 잔존하는 한줌의 신앙을 거두어 내고서, 내가 가진 이성으로 예수와 기독교를 둘러싼 담론들을 가능한 과학적으로 접근해 보는 것은 ‘신앙’을 위해서도 유익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기독교 내부의 모순을 가장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까발리는 유일한 방식이기도 하다.

정통 신앙을 계승했다는 이른바 정통 기독교인들은 대개 그들의 신앙-진리의 담지자라 여겨지는 기독교-교회 집단의 내부 모순을 열정적으로 모르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무지에의 열정’은 교회-권력에 의한 지배 효과라 불릴 만하다. 스스로를 진리라 참칭하는 교회-권력은 내부 모순에 도전하는 일련의 움직임에 대해 ‘이단’이라는 딱지를 붙여가며 ‘무지에의 열정’을 강요해 온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때문에 기독교인 일반은 이단의 딱지를 붙이고서 교회-권력으로부터 제거될 것을 두려워하여 기꺼이 복종을 자청하고 나서는 것이다. 그들의 신앙의 근거인 예수 정신을 왜곡하는 일련의 모순들을 열정적으로 모르고자 하면서 말이다.

일레인 페이젤의 <성서 밖의 예수>(정신세계사: 1989년)는 그 같은 정통파 기독교인들의 ‘무지에의 열정’에 일격을 가할 훌륭한 저술이다. 페이젤은 그를 위해 오늘날 정통 기독교의 성서와 교리의 ‘절대 진리성’을 의문에 부친다. 그는 1600년 만에 빛을 본 비밀 복음서 이야기를 풀어내며 해답에의 노정을 시작한다. 1945년 12월, 이집트 남부 ‘나그 함마디’에서 고고학적으로 놀라운 문서가 발견된다. 오늘날 ‘나그 함마디(Nag Hammadi) 텍스트’라 불리는 고서 꾸러미다. 그 꾸러미에는 정통 기독교의 교리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전혀 다른 성서가 남아 있었다. 정통 기독교의 성서에선 볼 수 없는 <도마 복음서>, <빌립 복음서>, <야고보 비밀서>, <베드로가 빌립에서 보내는 서한>,<베드로 묵시록>, <애굽인 복음서>, <진리 복음서>, <마리아 복음서>등의 이름이 붙어 있었는데, 훗날 성서 고고학자들에 의해 그 텍스트들이 정통파 기독교인들에 의해 제거된 영지주의 기독교인들의 성서였음이 밝혀진다.

페이젤이 전하는 영지 복음서의 몇몇 구절들은 과연 놀랄 만 한 것들이다. 이를테면, <도마 복음서>에는 다음과 같은 예수의 말이 나온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네 안에 있는 것을 낳으면, 네가 낳은 것이 너를 구할 것이다. 네가 네 안에 있는 것을 낳지 못하면, 네가 낳지 못한 것이 너를 파멸시킬 것이다.” 이 구절에서 발견되는 예수는 선(禪)을 설파하는 불자의 모습이다. 이뿐 아니다. 영지 복음서엔 이른바 정통 기독교를 대놓고 부정하는 것들로 가득하다. 영적 깨달음을 부활의 메세지라 믿었던 영지주의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제자였던 도마를 예수의 쌍둥이 형제라 전하는가 하면, 동정녀 탄생을 영적 부활의 상징적인 의미로 읽어낸다. 그들은 육체의 부활을 믿는 정통 기독교인들을 순진한 의식의 소유자라 비판한다. 영지주의 기독교인들에게 예수의 부활 사건은 ‘영혼의 부활을 통해 누구나 예수의 반열에, 즉 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상징적 메세지였던 것이다.

페이젤이 들려주는 낯선 이야기는 분명 충격적이다. 책을 읽으면서 수 없이 많은 도리질을 쳤다. 혼란스러웠고 얼마간은 두려웠다. 만일 페이젤이 전하는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영지주의 복음서의 이야기들이 진리의 일단이라도 지니고 있다면, 내가 알고 신앙으로 받아들인다는 기독교는 의심받아 마땅한 것이 아닐까. 하기야 정통파 기독교인들이 베드로를 이어 사제를 제도화하고 그로써 절대무이의 진리의 담지자로 스스로를 신격화했다는 사실. 그리고 기독교 공인 이후, 권자적 지위를 보다 공고히 하기 위해 존재하던 수많은 기독교의 분파를 폭력으로 제압했다는 역사-정치적 맥락은 충분히 수긍할 만한 것들이다. 영지주의 기독교인들이 그 일부였음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영지주의 복음서가 전하는 그들만의 교리가 진리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모든 것을 상징으로 읽어내는 그들의 해석은 정통 기독교의 그것보다도 낡은 것이어서 내 마음의 줄을 퉁기지 못한다. 결국 정통 기독교인의 신앙이든, 영지주의 기독교인의 신앙이든 그것이 과학의 외부에 위치함은 매 한가지다. 그 말은 어느 것도 과학적 검증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뜻한다. 때문에 책을 마무리 지으면서, 나는 내 신앙의 동심원과 보다 많은 부분을 공유하는 정통 기독교의 복음서가 여전히 영지주의의 그것보다 울림의 폭이 큰 것임을 다시 한번 새긴다. 이 세계의 육체의 고통과는 동떨어진 곳에서 저 혼자 웅얼대는 <도마 복음서>의 예수는, 세계 한 가운데 꼿꼿이 서서 세상을 갈아엎는 <마가복음>의 예수에 비해 얼마나 빈약한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영지주의 복음서의 역사적-정치적 맥락이 집단화되고 권력화된 기독교-교회에 던지는 의미를 긍정한다. 그들의 ‘소멸의 역사’는 정통 기독교의 ‘타락의 역사’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정통 기독교가 예수 정신으로부터 한없이 멀어지면서 스스로를 진리화, 권력화하던 틈바구니에서 그들이 사라져 갔던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든 살아남았다면, 예수에 대한, 기독교에 대한 논의의 폭이 어떤 식으로든 보다 넓어졌을 것임은 자명하다. 이른바 교회-폭력이 효과적으로 뿌리 내리지만 않았었더라면 오늘의 기독교-교회의 형태는 사뭇 달랐을 것이다.

교회-폭력은 영지주의 기독교인들의 평등한 교회 연합체를 폭력으로 제거했다. 일찍이 흑인에게 영혼이 없다고 공언했던 중세의 한 주교는 노예 제도를 합법화하는데 빌어먹을 교회-폭력을 사용하기도 했었다. 그러니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스스로를 진리의 담지자라 믿는 집단의 폭력이다. 하여, 오늘 예수 정신의 올바른 구현을 위해서는 ‘언제나-이미-참’이라 주장되는 기독교-교회 집단의 존재 양식과 교리를 끊임없이 의문에 부쳐야할 것이다. ‘성서 밖의 예수’가 필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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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 저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02월

종일 내 몸의 모든 구멍이 막힌 듯 답답하다. 그런데도 나는 창문을 닫고서 웅크리고 있다. 어쩐지 문을 열면 내 몸의 막힌 구멍이 일거에 뚫려 육체가 찢길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엄습한다. 방의 불은 끄고 삼파장 스탠드 불만 켜 두었다. 낡아선지 스탠드 불빛이 예전만 못하다. 나는 밤에 책을 읽을 때 꼭 방의 불을 끄고 스탠드 불빛 아래서 보는 습관이 있는데, 그 까닭은 확실치 않다. 왜일까?

요즈음 내가 주로 읽는 책은 이종영의 『욕망에서 연대성으로』(백의, 1998)인데 그의 저작을 죄다 읽어버리고 싶은 욕심이 든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지금껏 읽어 둔 그의 책만이라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책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건 대체 어느 정도를 뜻하는 걸까? 나는 그것을 마치 그가 말하듯 그의 책을 내가 줄줄 꿸 수 있을 정도라고 나름대로 정해 두었다. 그렇게 정하고보니 책을 읽을 때마다 짜증이 밀려온다. 그런 정도까지 책을 읽고 이해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에 대한 이상한 집착이 있다. 병이라면 병이다. 이러다간 한 권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할지 모른다.

방의 불을 끄고 한껏 웅크리고서 집어 든 책은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 읽은 횟수로만 세 번 쯤 되는 내 열독서다. 김현의 책은 그것에 맛을 한번 들이면 도무지 헤어나기 힘든 마약과 같다. 간혹 그의 정신세계가 지나치게 관념적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나는 진실로 그의 문체와 거기에 녹아든 농밀한 사유를 훔치고 싶다. 김현의 생각 하나: 육체는 자기가 고통스러우면 사고를 중단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그 고통에서 먼저 해방되려 한다. 맹목적이 아니라 맹사적이라 할까. 내 생각 하나: 젊은 한 때를 지배했던 이른바 정의로운 ‘이즘(-ism)’의 행렬이, 젊음이 기울어질 무렵 사라지는 일반적 진리는 아마도 이러한 육체의 메커니즘에 근거한 것이 아닐까. 맹사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동물적 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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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ㅣ 박진규 지음 ㅣ 2005년 12월

그러니까, 문제는 도발이었다. 소문을 듣고 진즉 사 놓고도 책을 펼치지 못했다. 견고한 소설 문법을 뒤집어 놓은 발칙함이 거슬렸던 게다. 박진규의 <수상한 식모들>은 작심하고 읽어야 하는 책이다. 소설 읽기에 제법 익숙한 독자라면 더욱 그렇다. 문학동네 수상작이란 타이틀만으론 독해 과정을 담보해줄 수 없다.

다시 책을 펼친 건 신혼여행 길에서였다. 소설이 신인 작가의 것이었으므로, 허니문의 동반자로서 마땅하리라 여겼다. 그의 발칙함도 신선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 싶었다. 하긴 신혼여행 아니겠는가. 나를 둘러 싼 모든 것이 완전히 변하는 순간! 그랬다. 생각은 적중했다. 독일로 가는 12시간의 비행 시간 동안 나는 이 소설이 건네는 도발적인 상상력에 흠뻑 취했다.

소설은 단군신화를 해체하며 시작한다. 흔히들 마늘과 쑥만 먹고 인간이 된 곰에만 집중한다. 곰이 단군의 모친이라고 주장하는 ‘신화’의 설레발 때문이다. 그런데 곰과 같이 고행을 하던 중 뛰쳐나온 호랑이는 어떻게 됐을까? 소설은 이 엉뚱한 관심에서 출발했다. 소설에선 이 호랑이는 이후 온갖 짐승을 잡아먹고 지내다 ‘여성’으로 환생했다는 상상력이 흘러 나온다. 이 여성은 ‘호랑 아낙’이라 불렸으며 이후 ‘수상한 식모’가 돼 우리 역사의 곳곳을 주물렀다는 것이다.

소설은 전복적이다. 점잖은 문학 개론을 들먹이자면, 내러티브를 구성할 수 이야기가 감히 소설의 옷을 입고 나온 셈이다. 그런데 잘 읽힌다. 어째서일까. 역설적으로 이야기가 엉성해서다. 누구도 한 적 없는 이야기를 숨가쁘게 쏟아내기 때문이다. 소설이 ‘식모’에 주목했다는 것도 신선하다. 식모는 늘 문화 콘텐츠의 변두리를 서성대는 캐릭터다. 산업화 시절이나 농촌 해체의 한 과정에서 주변 인물로 등장하는 게 전부다. 그런데 소설은 식모가 우리 역사의 격랑기에 직간접적으로 간여해 왔다는 사실을 선포한다. 감히 단군신화를 마음대로 해체한 결과로 말이다.

문학동네 심사위원들의 말을 훔치면, 이 소설은 그럼에도 여전히 엉성한 어휘력과 구성력으로 흠집이 많다. 책을 읽던 중 자꾸만 앞장으로 뒷걸음쳐야 하는 것도 그래서다. 하지만 소설의 발칙한 상상력은 쉽게 보아 넘기기 힘들다. 그 상상력의 뿌리가 현 세계를 주무르는 자본주의 비판에 닿아있어서다. 소설에서 수상한 식모는 부르주아 가정에 들어가 가정을 해체하는 인물로 그려지는데, 여기에 작가적 시선이 묻어난다. 주인공 경호가 100kg이 넘는 거구로 그려지는 것도 비만이 자본주의의 한 상징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신인의 발칙함을 핑계로 우리네 단란한 삶을 옥죄는 자본주의에 일격을 가하는 데까지 가 본 것이다. 그 도발이 속 시원하고, 그 전복이 개운하다. 기존 소설 문법을 조롱하고 까마득한 신화를 뒤집은 결과 자본주의 비판이라는 묵직한 울림을 남긴 것이다. 현실 세계를 매몰차게 전복할 수 있는 건 아무래도 나잇살 덜 먹은 신인 작가들이 낫다. 그런 의미에서 박진규는 젊고 건강한 신인이다.  '사망 선고'에 임박한 우리 문학엔 이미-존재하는- 것을 대놓고 조롱할 수 있는 더 많은 박진규가 필요한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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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도 좀체 책을 펼치기가 힘들다. 게을러서다. 꿈쩍도 하기 싫어서다. 내내 잉여가치-결국 내 것도 아닌-를 생산하다 보면 사실 지칠만도 하다. 그러니 잠을 자거나 TV 채널을 돌리는 게 고작이다. 아주 사소한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은 게다. 사실은 잠은 스스로에게 이로운 면이 있다. 하지만 분명히 하자. 잠이란 오직 제 육체만을 배려한 행위다. 와중에 말랑하던 정신은 딱딱하게 굳어간다.  탐면 耽眠 대신 탐독 耽讀이 필요한 이유다.

이정우의 '탐독'을 말한다. 달포 전 내 소박한 독서량을 돌아보게 했다. 고질적인 독서 편력도 꼬집었다. 책에 적힌 이정우 개인의 독서사(史)가 그랬다.  철 들고 처음 읽은 책이 전영택의 '화수분'이라고 그는 적었다. 낡은 책 냄새로 가득한 제 아비의 방에서다. 첫 경험은 강렬했다. 당대 가난의 문제를 섬뜩하게 묘파한 소설 앞에서 소년 이정우는 아연했다. 실존의 문제를 똑똑히 알려준 독서는 그에게 섬뜩하나 매력있는 노동이 됐다.

이정우에게 탐독이란 사유의 여행을 가능케하는 '탈 것'이다. 때로는 문학을 타고, 어떤 날엔 과학으로 갈아탄다. 불쑥 철학에게 자리를 내 주기도 한다. 역사학과 정치경제학이 끼어드는 것은 물론이다. 책은 이토록 요란한 사유-여행에 대한 꼼꼼한 보고서다. 그는 독서에도 '가로 지르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인간의 사유란 총체적이어서 하나의 탈 것만으론 종착지에 다다를 수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영역을 가로지르는 독서가 필요한 것은 그래서다. 전체를 조망하는 지도는  무수한 가로지르기를 거치고서야 완성되는 법이다: 탐독이란 사유-지도를 그려내는 찬란한 노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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