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라는 이름은 예수 이후 인류사의 중량과 맞먹는다. 그가 십자가의 수난을 겪은 것은 그의 나이 33세 되던 해, 그러니까 서기 33년의 일이고, 조지 부시가 예수의 이름을 부르대며 이라크로 진격한 것은 서기 2003년이다. 인류는 예수를 둘러싼 수많은 전쟁을 치뤄내며 예수 없는 이천 년을 살아왔다. 영광의 부활을 맞이하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예수는 그 이천 년 동안, 제 이름을 둘러싼 싸움박질을 그저 관망하고 있다.
인간 영혼의 해방을 역설했다는 예수는 오늘 어디에 있는가. 그가 아버지라 부르는 하나님은 또 어디에 있는가. 유대의 족장사는 아브라함의 장자인 이스마엘에게서 아랍 민족이, 늦둥이 아들인 이삭에게서 이스라엘 민족이 뻗어 나왔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의 세계는 한 아비에게서 난 두 아들이 같은 신을 섬기면서 서로 싸우고 있는 형국인 셈이다. 하나는 야훼의 이름으로. 다른 하나는 알라의 이름으로. 이런 증오와 절망으로 가득한 세계를 두고 모든 사랑의 절대치인 예수가, 그 아비인 하나님이 왜 개입하지 않는가. 그들은 대체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단 말인가.
애석하게도 기독교인인 나는 그 답을 모른다. 아니, 알지만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 ‘안다고 믿는 것’이다. 교회 학교가 내 두뇌 깊숙이 기입해둔 성경과 교리에 관한 지식들은 그에 대한 모범 답안을 마련해두고 있지만, 나는 그것들이 인간의 이성과 불화할 것을 안다. 어떤 이성적 논리로도 설명될 수 없는 것. 우리는 그것을 일러 ‘신앙’이라 부른다. 치밀한 논리로 논증되지 않는 지식은 ‘과학’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다. 때문에 신앙은 과학적 논증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내 평소의 생각이다. 그러나 내 안에 잔존하는 한줌의 신앙을 거두어 내고서, 내가 가진 이성으로 예수와 기독교를 둘러싼 담론들을 가능한 과학적으로 접근해 보는 것은 ‘신앙’을 위해서도 유익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기독교 내부의 모순을 가장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까발리는 유일한 방식이기도 하다.
정통 신앙을 계승했다는 이른바 정통 기독교인들은 대개 그들의 신앙-진리의 담지자라 여겨지는 기독교-교회 집단의 내부 모순을 열정적으로 모르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무지에의 열정’은 교회-권력에 의한 지배 효과라 불릴 만하다. 스스로를 진리라 참칭하는 교회-권력은 내부 모순에 도전하는 일련의 움직임에 대해 ‘이단’이라는 딱지를 붙여가며 ‘무지에의 열정’을 강요해 온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때문에 기독교인 일반은 이단의 딱지를 붙이고서 교회-권력으로부터 제거될 것을 두려워하여 기꺼이 복종을 자청하고 나서는 것이다. 그들의 신앙의 근거인 예수 정신을 왜곡하는 일련의 모순들을 열정적으로 모르고자 하면서 말이다.
일레인 페이젤의 <성서 밖의 예수>(정신세계사: 1989년)는 그 같은 정통파 기독교인들의 ‘무지에의 열정’에 일격을 가할 훌륭한 저술이다. 페이젤은 그를 위해 오늘날 정통 기독교의 성서와 교리의 ‘절대 진리성’을 의문에 부친다. 그는 1600년 만에 빛을 본 비밀 복음서 이야기를 풀어내며 해답에의 노정을 시작한다. 1945년 12월, 이집트 남부 ‘나그 함마디’에서 고고학적으로 놀라운 문서가 발견된다. 오늘날 ‘나그 함마디(Nag Hammadi) 텍스트’라 불리는 고서 꾸러미다. 그 꾸러미에는 정통 기독교의 교리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전혀 다른 성서가 남아 있었다. 정통 기독교의 성서에선 볼 수 없는 <도마 복음서>, <빌립 복음서>, <야고보 비밀서>, <베드로가 빌립에서 보내는 서한>,<베드로 묵시록>, <애굽인 복음서>, <진리 복음서>, <마리아 복음서>등의 이름이 붙어 있었는데, 훗날 성서 고고학자들에 의해 그 텍스트들이 정통파 기독교인들에 의해 제거된 영지주의 기독교인들의 성서였음이 밝혀진다.
페이젤이 전하는 영지 복음서의 몇몇 구절들은 과연 놀랄 만 한 것들이다. 이를테면, <도마 복음서>에는 다음과 같은 예수의 말이 나온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네 안에 있는 것을 낳으면, 네가 낳은 것이 너를 구할 것이다. 네가 네 안에 있는 것을 낳지 못하면, 네가 낳지 못한 것이 너를 파멸시킬 것이다.” 이 구절에서 발견되는 예수는 선(禪)을 설파하는 불자의 모습이다. 이뿐 아니다. 영지 복음서엔 이른바 정통 기독교를 대놓고 부정하는 것들로 가득하다. 영적 깨달음을 부활의 메세지라 믿었던 영지주의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제자였던 도마를 예수의 쌍둥이 형제라 전하는가 하면, 동정녀 탄생을 영적 부활의 상징적인 의미로 읽어낸다. 그들은 육체의 부활을 믿는 정통 기독교인들을 순진한 의식의 소유자라 비판한다. 영지주의 기독교인들에게 예수의 부활 사건은 ‘영혼의 부활을 통해 누구나 예수의 반열에, 즉 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상징적 메세지였던 것이다.
페이젤이 들려주는 낯선 이야기는 분명 충격적이다. 책을 읽으면서 수 없이 많은 도리질을 쳤다. 혼란스러웠고 얼마간은 두려웠다. 만일 페이젤이 전하는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영지주의 복음서의 이야기들이 진리의 일단이라도 지니고 있다면, 내가 알고 신앙으로 받아들인다는 기독교는 의심받아 마땅한 것이 아닐까. 하기야 정통파 기독교인들이 베드로를 이어 사제를 제도화하고 그로써 절대무이의 진리의 담지자로 스스로를 신격화했다는 사실. 그리고 기독교 공인 이후, 권자적 지위를 보다 공고히 하기 위해 존재하던 수많은 기독교의 분파를 폭력으로 제압했다는 역사-정치적 맥락은 충분히 수긍할 만한 것들이다. 영지주의 기독교인들이 그 일부였음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영지주의 복음서가 전하는 그들만의 교리가 진리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모든 것을 상징으로 읽어내는 그들의 해석은 정통 기독교의 그것보다도 낡은 것이어서 내 마음의 줄을 퉁기지 못한다. 결국 정통 기독교인의 신앙이든, 영지주의 기독교인의 신앙이든 그것이 과학의 외부에 위치함은 매 한가지다. 그 말은 어느 것도 과학적 검증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뜻한다. 때문에 책을 마무리 지으면서, 나는 내 신앙의 동심원과 보다 많은 부분을 공유하는 정통 기독교의 복음서가 여전히 영지주의의 그것보다 울림의 폭이 큰 것임을 다시 한번 새긴다. 이 세계의 육체의 고통과는 동떨어진 곳에서 저 혼자 웅얼대는 <도마 복음서>의 예수는, 세계 한 가운데 꼿꼿이 서서 세상을 갈아엎는 <마가복음>의 예수에 비해 얼마나 빈약한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영지주의 복음서의 역사적-정치적 맥락이 집단화되고 권력화된 기독교-교회에 던지는 의미를 긍정한다. 그들의 ‘소멸의 역사’는 정통 기독교의 ‘타락의 역사’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정통 기독교가 예수 정신으로부터 한없이 멀어지면서 스스로를 진리화, 권력화하던 틈바구니에서 그들이 사라져 갔던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든 살아남았다면, 예수에 대한, 기독교에 대한 논의의 폭이 어떤 식으로든 보다 넓어졌을 것임은 자명하다. 이른바 교회-폭력이 효과적으로 뿌리 내리지만 않았었더라면 오늘의 기독교-교회의 형태는 사뭇 달랐을 것이다.
교회-폭력은 영지주의 기독교인들의 평등한 교회 연합체를 폭력으로 제거했다. 일찍이 흑인에게 영혼이 없다고 공언했던 중세의 한 주교는 노예 제도를 합법화하는데 빌어먹을 교회-폭력을 사용하기도 했었다. 그러니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스스로를 진리의 담지자라 믿는 집단의 폭력이다. 하여, 오늘 예수 정신의 올바른 구현을 위해서는 ‘언제나-이미-참’이라 주장되는 기독교-교회 집단의 존재 양식과 교리를 끊임없이 의문에 부쳐야할 것이다. ‘성서 밖의 예수’가 필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