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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10 :: 버스,정류장
2007/11/10 :: 물랑루즈

습관은 언어화된 질서다. 언어가 그 환경을 따라 자연스레 체득되듯, 습관 역시 환경에 맞춰 스스로의 질서를 구축한다. 내게 ‘불면’이 습관인 것은 내 안에 상념이 쌓이는 환경 탓이고, ‘독서’가 습관인 것은 그 상념들을 내 쫓아야만 하는 내 특별한 환경 때문이다. 해야 할 일은 많고 가야할 길은 먼, 아니 어디로 가야할지조차 가늠하기 힘든 요사이의 내 특수한 사정말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차라리 다행이다. 이런저런 잡념을 쫓기 위해 글쪼가리를 하나라도 더 읽게 되니 말이다. 내가 탐독하는 몇몇 책들에 담긴 글조각 치고 내 단촐한 정신세계를 뛰어넘지 않는 글이 없다. 잡념을 쫓으려다 되려 생각 꾸러미를 더 얹는 격이 되곤 하지만 지성들의 글 한 줄이 내게는 이롭기만 하다. 그런 이로움마저 없었다면 나의 새벽은 얼마나 공허할까. 매일 새벽을 그런 공허함에 흘릴 생각을 하면 정말이지 아찔하다.

오늘 내 쪼그라든 새벽을 부풀린 이는 ‘이아무개’다. ‘이아무개’는 이현주 목사의 필명. 그는 제 존재에 대한 극도의 겸양의 표시로 제 필명을 ‘아무개’라는 불특정 대명사로 지칭한다. 잠을 청하다 실패하고 책을 읽는 내 습관은 오늘도 결코 오작동 하지 않는다. 그 습관적 독서가 가 닿은 곳이 바로 ‘이아무개’의 ‘사람의 길 예수의 길’이라는 에세이집. 내 가슴을 후벼파는 이야기들로 빼곡히 들어차있는 수작이다.

우선 책의 구성부터가 흥미롭다. 책은 2부로 구성되는데 앞의 1부는 시몬 베드로가 화자이고, 2부는 예수가 화자로 등장한다. 물론 ‘이아무개’가 임의로 그렇게 설정한 것이다. 그런데 그 설정이 끌어내는 감동의 깊이가 어지간하다. 자신의 배신을 참회하는 베드로의 낮은 목소리는 예수에 대한 배신을 밥 먹듯 하는 내 목소리인 것만 같다. 가시 면류관을 쓴 채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절규는 내 심장에 가시가 되어 박힌다. 그 자신 정치범이 아님에도 정치범으로 몰려죽은 예수가 ‘억압받는 이들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정치범이 되어 죽겠다’라 말하는 대목에선 예수가 내 가슴을 찢고 걸어 들어오는 착각마저 든다.

그 속절없는 회한과 착각 속에서, 나는 소스라치듯 놀라며 나를 규정하는 또 하나의 습관을 떠올린다. 불면의 습관보다 고약하고, 독서의 습관이 주는 한줌의 유익도 없는, 오히려 해악인 그 습관. 밤낮 예수 정신이 어쩌고를 떠들면서, 심지어 겁도 없이 ‘맑스를 넘어 예수를 좇아’라는 가당치도 않는 인생관을 떠들면서도, 단 하루도 그를 따라 살지 못하는 내 몹쓸 습관. 이아무개가 시몬의 입을 빌려 에두르듯 뱉어내는 참회는 그 누구보다 나의 몫이어야 한다. 약한 자 편에서 사랑으로 세상을 덮어버린 그 예수의 ‘쿨함’에 나는 그저 멋스러움을 느꼈을지 모른다. 다년간 교회를 통해 알던 박제화된 예수가 아닌 꼿꼿이 살아있는 그 예수를 발견하며 나는 단지 그 정의로움에 반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예수처럼’을 입버릇처럼 말하면서 마치 내가 정의로운 양 행세했을 지도 모른다. 정작 내가 닮아가야할 예수는 내 심연의 감옥에 꽁꽁 가두어둔 채.

이아무개는 이런 일화를 전한다. 그가 시국의 여파에 밀려 독방 감옥에 갇히던 날 이야기다. 감옥 문이 열리고 발을 들여 놓는데 누군가 말을 걸더란다. “이제 오니?” 분명 독방인데 누군가 했더니 담요 뭉치였다고 한다. 그런데 잠시 후 또 목소리가 들려온다. “많이 기다렸단다, 이아무개야” 짐작하다시피 이아무개가 전하는 그 누군가는 예수였다. 물론 이것은 이아무개가 다소 상징적 의미로 자신의 체험을 전하고 있는 것일 테다. 하지만 그의 일화는 오늘 나의 수치스러움과 정확히 공명한다. 내 심연의 감옥에 정의의 예수, 약한 자의 예수, 해방자 예수를 가두어 둔 채, 더러운 입만 나불대는 내 위악한 습관. 그 악취나는 질서. 나는 그 습관의 감옥에서 예수를 구출할 수 있을까. 그리하여 내가 오히려 그 안에 갇힐 자신이 있는 걸까. 하기야 입만 떠들고 근육은 꼼짝하지 않는 내 못된 습관이 어디 예수 정신뿐이랴: 나는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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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통이란 엠마뉘엘 레비나스의 타당한 지적처럼,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것’, ‘참아낼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고통은 우리의 실존을 삼키며 마침내 존재 그 자체가 된다. 시간은 그러한 고통을 제거하는 유일한 것이다. 죽음에 이르는 고통이야 시간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일테지만, 대개의 고통은 시간의 흐름 속에 희석되기 마련이다. 시간의 치유를 감내해 낸 자아는 더 이상 동물학적 의미에서의 기계적이고 자동적인 삶을 살아내지 않는다. 자아의 내부에 깊숙이 스며든 고통이 자동적인 삶에 단 하나의 쉼표를 마련해 두는 것이다. 그 쉬어감의 꼭지에서 우리는 인간적 성찰을 경험하고 유래 없이 확장된 감수성을 발견한다. 고통의 미학. ‘고통’이라는 끔찍한 말에 세상의 아름다움을 논하는 ‘미학’을 덧붙일 수 있는 까닭은 고통이 그와 같은 감수성의 확장을 이끌어내는 탓이다. 고통을 경험한 자아는 그와 동일한 고통을 겪는 타자를 향해 한껏 자아를 열어 놓는 것이다.

2. '버스, 정류장'은 그 ‘고통’과 ‘확장된 감수성’에 관한 영화이다. 아니다, 이 말은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을 말할 뿐, 영화의 전체를 말해주지 못한다. 영화는 오히려 ‘고통’에서 ‘확장된 감수성’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관한 이야기인데, 영화의 제목에 첨가된 ‘쉼표’가 그 모든 성찰을 담고 있다. 언어적 지각 양식에 의해 규정되는 삶을 잠시 멈춰 세우고 나의 고통과 너의 고통이 만나는 자리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영화는 몹시도 아파한다. 고통과 고통이 만나는 그 자리는 몹시 불확정적이기 때문이다. 삶이 대개 그러하듯, 참을 수 없는 고통이 확장된 감수성에 이르는 과정은 어떤 불확정성에 기대고 있다. 영화에서 학원 국어 강사인 재섭에게 학생들이 대뜸 묻는다. “선생님, 엔트로피가 뭐에요?” 불쑥 끼어든 대사는 사실 영화가 말하려는 부분을 가장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엔트로피의 사면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인간이라면, 영화는 담담히 그 엔트로피에 자신을 내맡긴, 말하자면 인간 일반을 거스르는 두 인물을 내세운다. 재섭과 소희. 세상이 언어적으로 규정해 놓은 질서를 거부하며 자아를 유폐시킨 두 인물은 그 상징적 질서로부터 도태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몹시 고통스러워한다. 그리고 마침내 재섭의 고통과 소희의 고통이 만난다. 버스, 정류장에서.

3. '버스, 정류장'을 보는 일은 사실 여러모로 불편했다. 그것이 낯선 내러티브 탓인지, 극도로 절제된 감정과 과감히 생략된 디테일 때문인지 그것은 ‘불확정적’이다. 다만, 재섭과 소희의 고통이 만나는 자리를 조용히 따르다보면, 마침내 다다르게 되는 우리 내부의 고통이 나의 자아를 까발리는 불편함을 이끄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슬쩍 시작했다가 은근히 끝나버리는 영화에서 우리는 인물들의 드라마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구할 수 없다. 무슨 까닭인지는 정확지 않으나 어른의 세계가 요구하는 상징적 질서를 거부하는 재섭과 소희는 서로에게서 자신의 고통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들의 감수성은 고통을 발견하는 순간, 무한 확장되지 않는다. 영화가 어떠한 정점도 생략한 채, 건조한 내러티브로 전개되는 것도 그 같은 까닭이다. 영화는 고통의 자아들이 만나는 자리를 지나칠 정도의 인내심을 가지고 천천히 뒤따르는데, 재섭과 소희가 소통하는 지점에 종국에 관객들을 포섭하기 위한 전략인 듯 싶다. 여느 멜로였다면, 어느새 격정적인 사랑으로 번졌을 재섭과 소희는 절제된 카메라 속에서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하며 일정한 긴장을 유지한다. 마치, 돌아옴과 떠나감을 반복하는 버스와 정류장의 관계처럼 고통과 확장된 감수성 사이에서 그들은 머뭇거린다.

4.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길게 늘어지는 그들의 머뭇거림은 결과적으로 관객들을 그 가운데로 불러들인다. 어쩐지 불편함을 계속해서 감지해야만 하는 관객들은 삶의 보편적 불편함 때문에 그들의 고통의 향유에 기꺼이 동참할 수 있다. 글쓰는 재주를 지닌 재섭이 결코 제도권으로 편입되지 못한다던가, 소희의 원조교제, 친구의 자살 등과 같은 구체적인 삶의 내용은 그리 중요치 않아 보인다. 오히려 감독이 바라는 것은 보편적 의미에서의 고통스런 삶과 삶이 만나는 것이며 그 소통에 관객이 끼어들기를 주문하는 것이다. 고통은 성찰을 부르는 법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고통이 치유되는 가운데 쉬어감의 꼭지가 분명 있다고 했다. 그 쉬어감의 꼭지에서 우리는 우리가 경험한 고통 때문에 타자의 고통을 향해 감수성을 활짝 열 수 있는 것이다. '버스, 정류장'은 영화를 보는 내내 우리의 감수성을 열고자 애쓰는 영화이다. 서두르지 않고 쉬어가듯 이어지는 이야기는 재섭의 고통과 소희의 고통 그리고 관객의 고통이 만나는 장을 만들어낸다. 영화의 말미에 재섭과 소희가 타고서 떠나는 버스를 길게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은 그대로 관객의 시선과 일치한다. 비로소 확장된 감수성으로 서로를 내면으로 받아들인 재섭과 소희. 나는 감독의 시선을 따라, 한참을 그들이 떠나는 뒤를 지켰다. 비로소 그들을 내 감수성이 받아들이고 있음을 감지하면서. 버스, 정류장에서 ‘우리’의 ‘고통’이 만났다.

2002. 03. 14.
K.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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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이 실존의 한 근거라면, 사랑은 욕망의 한 근거이다. 욕망하므로 살아있다라면, 우리는 한편으로 ‘사랑하므로 욕망한다’고 말할 수 있을테다. 자아에 대한 사랑은 실존의 결핍을 보상하기 위한 욕망을 작동시키고, 타자를 ‘향한’ 사랑은 타자‘로부터’의 사랑을 욕망하게 한다. 그것이 사랑-욕망의 메카니즘이다. 다시, 사랑이 욕망의 한 근거라는 말은 모든 사랑이 결국 나르시스적인 것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타자를 향한 사랑이 결국 타자로부터의 사랑으로 귀속됨은 모든 사랑의 밑자리에는 결국 확고한 자아가 자리하고 있음을 뜻한다. 하여, 모든 종류의 사랑은 자기애의 틀 안에 갇힐 수밖에 없다.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그렇다. 아니, 보편적으로는 그런 것이다.

그러나 무릇 위대함이란 보편성을 뛰어넘는 데서 작동한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위대한 사랑이란 위에서 애써 밝힌 실존의 밑자리를 뒤집는 데서 태동한다. 자아의 결핍을 보상받기 위한 사랑, 타자의 사랑을 욕망하는 그러한 사랑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타자의 결핍을 채우고 타자의 존재의 비약을 원조하려는 욕망을 생산하는, 철저하게 이타적인 사랑. 그것은 과연 위대한 사랑임에 틀림없다. 여기, 그러한 위대한 사랑이 있다. 그것은 차라리 악마적으로 위대한 그런 사랑이다. 파멸이 전제가 된 사랑.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 기포처럼 지워지는 사랑. 그래서 더 빛나는 사랑. 세기말 온갖 불순한 욕망이 들끓는 파리의 물랑루즈에서 악마적으로 아름답고 위대한 사랑이 시작된다. 물랑루즈. 이 유쾌하고도 비극적인 영화는 바로 우리의 몽상 속에서나 가능한 ‘영원한 사랑’을 노래하는 발칙한 영화다. 자, 클럽 물랑루즈의 문을 열고 퇴폐와 환락의 공간 속에서 그 꿈의 사랑을 찾아보자.

영화의 서사는 세 가지 욕망의 줄기를 따라 진행된다. 그 하나는 가난한 극작가 크리스티앙의 사틴에의 욕망. 엉뚱하게도 극작가의 길에 들어선 크리스티앙은 19세기 말의 전형적인 보헤미안적 예술혼을 한 여인에의 사랑으로 전화시킨다.요란하고 퇴폐적인 분위기의 물랑루즈 클럽에서 요부 사틴과 마주한 크리스티앙은 마침내 사틴을 사랑하게되고, 그녀‘로부터’의 사랑을 욕망하기에 이른다. 그 둘은 공작의 사틴에의 욕망이다. 이는 크리스티앙의 그것과 다소 그 양상이 다른데, 그것은 공작의 욕망이 타자의 사랑을 갈구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소유하려는 소유욕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대자본가인 공작은 물욕과 크게 다르지 않은 맥락에서 사틴을 소유하려 하며, 그를 위해 집요하게 그녀에게 하룻밤을 요구한다. 욕망의 마지막 줄기는 짐작하듯, 사틴의 욕망이다. 그녀의 욕망은 다소 이중적인 양상을 띠는데, 그것은 그녀의 욕망이 사랑에의 욕망과 자본에의 욕망이 중첩되어 있음으로 인해서이다. 요부 사틴은 그녀가 노래하듯, ‘다이아몬드’만이 여자의 삶을 구원할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히는 한편, 크리스티앙으로부터의 사랑을 욕망하는 야누스적 욕망을 지녔다. 이렇듯, 영화의 서사는 각기 다른 방향에서 뻗어난 세 욕망이 서로 뒤엉킨 양상을 띠고 있다. 크리스티앙의 욕망과 공작의 욕망이 양극이라면, 사틴의 욕망은 그 중간 지점에서 서성댄다.

욕망의 줄기의 뒤엉킴과 풀어냄. 영화 물랑루즈의 서사를 거칠게 이르자면, 흡사 퇴폐적 욕망이 마구 뒤섞인 물랑루즈의 공간적 이미지와도 같이, 엉겨붙은 세 욕망이 제 모양을 갖추어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영화의 밑자리를 차지한 욕망의 줄기는 서사의 흐름 가운데 점점 그 뒤엉킴을 풀어나간다. 이는 크리스티앙의 욕망과 사틴의 욕망이 만나는 지점에서 공작의 욕망이 주변으로 밀리는 형세라 할 수 있다. 서성대던 사틴은 물욕을 버리고 사랑을 좇는다. 사틴과 크리스티앙의 타자에의 사랑은 타자의 사랑을 갈구하는 타자에의 욕망으로 번지고, 그 욕망의 사생아인 ‘질투’를 앓는다. 공작과의 관계를 유지해야만 하는 사틴에게 강한 질투를 내보이는 크리스티앙의 모습은 그래서 안쓰럽다. 그러나 이들의 사랑이 이러한 종류의 욕망만을 증식한다면 결코 위대하다 할 수 없을테다.

결국, 죽어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사틴은 크리스티앙을 죽이려는 공작의 음모를 알아채고서 크리스티앙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욕망을 포기한다. 크리스티앙으로부터의 사랑을 욕망하기를 마다한 그녀의 사랑이 위대한 이타적 사랑으로 거듭나는 시점이다. 이는 마지막 장면에서 사틴의 사랑을 확인하고 마침내 죽어가는 사틴 앞에서 흐느끼는 크리스티앙과 만난다. 그녀의 마지막 부탁. “나를 위한 글을 써줘요. 그러면 영원히 당신과 함께 할거에요” 일년 후, 크리스티앙은 사틴을 위한 글을 쓴다. 파멸한 사랑이 영원을 그 수식어로 취하기 위해서는 ‘자기애(自己愛)'의 욕망을 넘어서야 한다. 사랑을 갈구할 대상이 사라진 상태에서도 작동하는 사랑은 그래서 위대하다. 이미, 파멸이 전제되었던 크리스티앙과 사틴의 사랑은 그리하여 악마적으로 위대한 영원한 사랑이 된다.

물랑루즈는 비극적으로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오르페우스 신화로부터 서사의 골격을 길어낸 바즈 루어만의 상상력은 유쾌함과 비장함이 뒤섞인 환상의 뮤지컬을 생산해내었다. 영원한 사랑을 ‘몽상’하는 그의 ‘몽상의 영상’에는 ‘환상’을 자아내는 화면과 노래, 춤이 버성김 없이 잘 직조되어 있다. 현실태라 하기에는 큰 용기가 필요한 ‘사랑의 위대함’ 혹은 ‘영원함’ 따위를 이야기하기 위한 루어만의 전략은 모든 장르가 혼합된 뮤지컬로 나타났다. 때문에 가난한 작가 크리스티앙과 창녀 사틴의 악마적으로 위대한 사랑은 환상적 영화 장치와 무리없이 접속한다. 19세기말 파리를 재구성해낸 영상은 종종 꿈의 장면을 연상시키고, 화면 한 구석에 박힌 조르쥬 멜리에스의 달은 결국, 영화의 사랑이 몽상과 환상일 수밖에 없음을 우회하여 성토한다. 그러나, 영화를 뒷받침하는 드라마가 촘촘히 그 리얼리즘의 빈칸을 메우면서 영화는 성길지언정 현실성도 담지한다. 환상과 현실을 오가는 영화는 노래와 대사가 번갈아가면서 머뭇거린다. 춤과 연기가 교차하면서 영화는 종종 관객을 들뜨게도 하고 가라앉게도 한다. 영화의 내부 이야기라할 수 있는 물랑루즈에서 공연되는 ‘극’은 영화의 외부 이야기와 적절히 맞물리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적 현실이 허구인가를 끊임없이 의심하게 한다.

허구를 들여다보던 관객은 그 허구 속에서 또 하나의 허구를 발견하고 당황한다. 영화가 이끌고 있는 영원한 사랑의 몽상-환상은 관객이 당황하는 틈에서 비극적인 감흥을 불러낸다. 유쾌한 상상력이 지배적인 이 뮤지컬 장르 영화에서 우리가 외려 그 엠티비적 영상을 넘어선 감동을 얻어내는 것은 역설이 아니다. 영화가 관객을 맘껏 쥐고 놓을 수 있는 힘을 획득한 이상, 우리의 미학적 경험은 전적으로 영화에 의해 가능해진다. 물랑루즈. 이 고답적인 신화적 상상력에 기초한 이야기에 기꺼이 매료될 수 있는 것은 ‘악마적으로 위대한 영원한 사랑’이라는 꿈의 이야기를 몽상-환상의 영상으로 풀면서 허구를 넘나드는 실재적 감동을 놓치지 않는 세심함 때문이다. 나는 ‘세기초’에 등장한 이 유쾌한 ‘세기말’의 사랑 이야기를 절대 지지한다. 영원한 사랑. 그 몽상-환상을 이제 나는 절대적으로 신뢰한다. 죄다 ‘물랑루즈’ 탓이다. 아마도 2001년이 낳은, 아니 21세기가 낳은 가장 위대한 영화 가운데 하나일 이 영화를 보며, 나는 오늘 내 처지를 더 없이 행복한 것으로 여겼다. 그리고 마침내 다음과 같이 내뱉었다. 꿈을 살아가는 나는 행복하다, 라고. 영화를 열고 닫는 지점에서 나래이터가 말한다. ‘마법에 걸린 소년이 있었다.’ 그럼, 그 마법에 걸린 소년이란 혹시 나일지도. 혹은 ‘영원한 사랑’을 신뢰하는 이 글을 읽는 당신일지도.

2001.12.26
K.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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