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이 실존의 한 근거라면, 사랑은 욕망의 한 근거이다. 욕망하므로 살아있다라면, 우리는 한편으로 ‘사랑하므로 욕망한다’고 말할 수 있을테다. 자아에 대한 사랑은 실존의 결핍을 보상하기 위한 욕망을 작동시키고, 타자를 ‘향한’ 사랑은 타자‘로부터’의 사랑을 욕망하게 한다. 그것이 사랑-욕망의 메카니즘이다. 다시, 사랑이 욕망의 한 근거라는 말은 모든 사랑이 결국 나르시스적인 것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타자를 향한 사랑이 결국 타자로부터의 사랑으로 귀속됨은 모든 사랑의 밑자리에는 결국 확고한 자아가 자리하고 있음을 뜻한다. 하여, 모든 종류의 사랑은 자기애의 틀 안에 갇힐 수밖에 없다.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그렇다. 아니, 보편적으로는 그런 것이다.
그러나 무릇 위대함이란 보편성을 뛰어넘는 데서 작동한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위대한 사랑이란 위에서 애써 밝힌 실존의 밑자리를 뒤집는 데서 태동한다. 자아의 결핍을 보상받기 위한 사랑, 타자의 사랑을 욕망하는 그러한 사랑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타자의 결핍을 채우고 타자의 존재의 비약을 원조하려는 욕망을 생산하는, 철저하게 이타적인 사랑. 그것은 과연 위대한 사랑임에 틀림없다. 여기, 그러한 위대한 사랑이 있다. 그것은 차라리 악마적으로 위대한 그런 사랑이다. 파멸이 전제가 된 사랑.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 기포처럼 지워지는 사랑. 그래서 더 빛나는 사랑. 세기말 온갖 불순한 욕망이 들끓는 파리의 물랑루즈에서 악마적으로 아름답고 위대한 사랑이 시작된다. 물랑루즈. 이 유쾌하고도 비극적인 영화는 바로 우리의 몽상 속에서나 가능한 ‘영원한 사랑’을 노래하는 발칙한 영화다. 자, 클럽 물랑루즈의 문을 열고 퇴폐와 환락의 공간 속에서 그 꿈의 사랑을 찾아보자.
영화의 서사는 세 가지 욕망의 줄기를 따라 진행된다. 그 하나는 가난한 극작가 크리스티앙의 사틴에의 욕망. 엉뚱하게도 극작가의 길에 들어선 크리스티앙은 19세기 말의 전형적인 보헤미안적 예술혼을 한 여인에의 사랑으로 전화시킨다.요란하고 퇴폐적인 분위기의 물랑루즈 클럽에서 요부 사틴과 마주한 크리스티앙은 마침내 사틴을 사랑하게되고, 그녀‘로부터’의 사랑을 욕망하기에 이른다. 그 둘은 공작의 사틴에의 욕망이다. 이는 크리스티앙의 그것과 다소 그 양상이 다른데, 그것은 공작의 욕망이 타자의 사랑을 갈구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소유하려는 소유욕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대자본가인 공작은 물욕과 크게 다르지 않은 맥락에서 사틴을 소유하려 하며, 그를 위해 집요하게 그녀에게 하룻밤을 요구한다. 욕망의 마지막 줄기는 짐작하듯, 사틴의 욕망이다. 그녀의 욕망은 다소 이중적인 양상을 띠는데, 그것은 그녀의 욕망이 사랑에의 욕망과 자본에의 욕망이 중첩되어 있음으로 인해서이다. 요부 사틴은 그녀가 노래하듯, ‘다이아몬드’만이 여자의 삶을 구원할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히는 한편, 크리스티앙으로부터의 사랑을 욕망하는 야누스적 욕망을 지녔다. 이렇듯, 영화의 서사는 각기 다른 방향에서 뻗어난 세 욕망이 서로 뒤엉킨 양상을 띠고 있다. 크리스티앙의 욕망과 공작의 욕망이 양극이라면, 사틴의 욕망은 그 중간 지점에서 서성댄다.
욕망의 줄기의 뒤엉킴과 풀어냄. 영화 물랑루즈의 서사를 거칠게 이르자면, 흡사 퇴폐적 욕망이 마구 뒤섞인 물랑루즈의 공간적 이미지와도 같이, 엉겨붙은 세 욕망이 제 모양을 갖추어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영화의 밑자리를 차지한 욕망의 줄기는 서사의 흐름 가운데 점점 그 뒤엉킴을 풀어나간다. 이는 크리스티앙의 욕망과 사틴의 욕망이 만나는 지점에서 공작의 욕망이 주변으로 밀리는 형세라 할 수 있다. 서성대던 사틴은 물욕을 버리고 사랑을 좇는다. 사틴과 크리스티앙의 타자에의 사랑은 타자의 사랑을 갈구하는 타자에의 욕망으로 번지고, 그 욕망의 사생아인 ‘질투’를 앓는다. 공작과의 관계를 유지해야만 하는 사틴에게 강한 질투를 내보이는 크리스티앙의 모습은 그래서 안쓰럽다. 그러나 이들의 사랑이 이러한 종류의 욕망만을 증식한다면 결코 위대하다 할 수 없을테다.
결국, 죽어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사틴은 크리스티앙을 죽이려는 공작의 음모를 알아채고서 크리스티앙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욕망을 포기한다. 크리스티앙으로부터의 사랑을 욕망하기를 마다한 그녀의 사랑이 위대한 이타적 사랑으로 거듭나는 시점이다. 이는 마지막 장면에서 사틴의 사랑을 확인하고 마침내 죽어가는 사틴 앞에서 흐느끼는 크리스티앙과 만난다. 그녀의 마지막 부탁. “나를 위한 글을 써줘요. 그러면 영원히 당신과 함께 할거에요” 일년 후, 크리스티앙은 사틴을 위한 글을 쓴다. 파멸한 사랑이 영원을 그 수식어로 취하기 위해서는 ‘자기애(自己愛)'의 욕망을 넘어서야 한다. 사랑을 갈구할 대상이 사라진 상태에서도 작동하는 사랑은 그래서 위대하다. 이미, 파멸이 전제되었던 크리스티앙과 사틴의 사랑은 그리하여 악마적으로 위대한 영원한 사랑이 된다.
물랑루즈는 비극적으로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오르페우스 신화로부터 서사의 골격을 길어낸 바즈 루어만의 상상력은 유쾌함과 비장함이 뒤섞인 환상의 뮤지컬을 생산해내었다. 영원한 사랑을 ‘몽상’하는 그의 ‘몽상의 영상’에는 ‘환상’을 자아내는 화면과 노래, 춤이 버성김 없이 잘 직조되어 있다. 현실태라 하기에는 큰 용기가 필요한 ‘사랑의 위대함’ 혹은 ‘영원함’ 따위를 이야기하기 위한 루어만의 전략은 모든 장르가 혼합된 뮤지컬로 나타났다. 때문에 가난한 작가 크리스티앙과 창녀 사틴의 악마적으로 위대한 사랑은 환상적 영화 장치와 무리없이 접속한다. 19세기말 파리를 재구성해낸 영상은 종종 꿈의 장면을 연상시키고, 화면 한 구석에 박힌 조르쥬 멜리에스의 달은 결국, 영화의 사랑이 몽상과 환상일 수밖에 없음을 우회하여 성토한다. 그러나, 영화를 뒷받침하는 드라마가 촘촘히 그 리얼리즘의 빈칸을 메우면서 영화는 성길지언정 현실성도 담지한다. 환상과 현실을 오가는 영화는 노래와 대사가 번갈아가면서 머뭇거린다. 춤과 연기가 교차하면서 영화는 종종 관객을 들뜨게도 하고 가라앉게도 한다. 영화의 내부 이야기라할 수 있는 물랑루즈에서 공연되는 ‘극’은 영화의 외부 이야기와 적절히 맞물리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적 현실이 허구인가를 끊임없이 의심하게 한다.
허구를 들여다보던 관객은 그 허구 속에서 또 하나의 허구를 발견하고 당황한다. 영화가 이끌고 있는 영원한 사랑의 몽상-환상은 관객이 당황하는 틈에서 비극적인 감흥을 불러낸다. 유쾌한 상상력이 지배적인 이 뮤지컬 장르 영화에서 우리가 외려 그 엠티비적 영상을 넘어선 감동을 얻어내는 것은 역설이 아니다. 영화가 관객을 맘껏 쥐고 놓을 수 있는 힘을 획득한 이상, 우리의 미학적 경험은 전적으로 영화에 의해 가능해진다. 물랑루즈. 이 고답적인 신화적 상상력에 기초한 이야기에 기꺼이 매료될 수 있는 것은 ‘악마적으로 위대한 영원한 사랑’이라는 꿈의 이야기를 몽상-환상의 영상으로 풀면서 허구를 넘나드는 실재적 감동을 놓치지 않는 세심함 때문이다. 나는 ‘세기초’에 등장한 이 유쾌한 ‘세기말’의 사랑 이야기를 절대 지지한다. 영원한 사랑. 그 몽상-환상을 이제 나는 절대적으로 신뢰한다. 죄다 ‘물랑루즈’ 탓이다. 아마도 2001년이 낳은, 아니 21세기가 낳은 가장 위대한 영화 가운데 하나일 이 영화를 보며, 나는 오늘 내 처지를 더 없이 행복한 것으로 여겼다. 그리고 마침내 다음과 같이 내뱉었다. 꿈을 살아가는 나는 행복하다, 라고. 영화를 열고 닫는 지점에서 나래이터가 말한다. ‘마법에 걸린 소년이 있었다.’ 그럼, 그 마법에 걸린 소년이란 혹시 나일지도. 혹은 ‘영원한 사랑’을 신뢰하는 이 글을 읽는 당신일지도.
2001.12.26
K.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