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은 언어화된 질서다. 언어가 그 환경을 따라 자연스레 체득되듯, 습관 역시 환경에 맞춰 스스로의 질서를 구축한다. 내게 ‘불면’이 습관인 것은 내 안에 상념이 쌓이는 환경 탓이고, ‘독서’가 습관인 것은 그 상념들을 내 쫓아야만 하는 내 특별한 환경 때문이다. 해야 할 일은 많고 가야할 길은 먼, 아니 어디로 가야할지조차 가늠하기 힘든 요사이의 내 특수한 사정말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차라리 다행이다. 이런저런 잡념을 쫓기 위해 글쪼가리를 하나라도 더 읽게 되니 말이다. 내가 탐독하는 몇몇 책들에 담긴 글조각 치고 내 단촐한 정신세계를 뛰어넘지 않는 글이 없다. 잡념을 쫓으려다 되려 생각 꾸러미를 더 얹는 격이 되곤 하지만 지성들의 글 한 줄이 내게는 이롭기만 하다. 그런 이로움마저 없었다면 나의 새벽은 얼마나 공허할까. 매일 새벽을 그런 공허함에 흘릴 생각을 하면 정말이지 아찔하다.
오늘 내 쪼그라든 새벽을 부풀린 이는 ‘이아무개’다. ‘이아무개’는 이현주 목사의 필명. 그는 제 존재에 대한 극도의 겸양의 표시로 제 필명을 ‘아무개’라는 불특정 대명사로 지칭한다. 잠을 청하다 실패하고 책을 읽는 내 습관은 오늘도 결코 오작동 하지 않는다. 그 습관적 독서가 가 닿은 곳이 바로 ‘이아무개’의 ‘사람의 길 예수의 길’이라는 에세이집. 내 가슴을 후벼파는 이야기들로 빼곡히 들어차있는 수작이다.
우선 책의 구성부터가 흥미롭다. 책은 2부로 구성되는데 앞의 1부는 시몬 베드로가 화자이고, 2부는 예수가 화자로 등장한다. 물론 ‘이아무개’가 임의로 그렇게 설정한 것이다. 그런데 그 설정이 끌어내는 감동의 깊이가 어지간하다. 자신의 배신을 참회하는 베드로의 낮은 목소리는 예수에 대한 배신을 밥 먹듯 하는 내 목소리인 것만 같다. 가시 면류관을 쓴 채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절규는 내 심장에 가시가 되어 박힌다. 그 자신 정치범이 아님에도 정치범으로 몰려죽은 예수가 ‘억압받는 이들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정치범이 되어 죽겠다’라 말하는 대목에선 예수가 내 가슴을 찢고 걸어 들어오는 착각마저 든다.
그 속절없는 회한과 착각 속에서, 나는 소스라치듯 놀라며 나를 규정하는 또 하나의 습관을 떠올린다. 불면의 습관보다 고약하고, 독서의 습관이 주는 한줌의 유익도 없는, 오히려 해악인 그 습관. 밤낮 예수 정신이 어쩌고를 떠들면서, 심지어 겁도 없이 ‘맑스를 넘어 예수를 좇아’라는 가당치도 않는 인생관을 떠들면서도, 단 하루도 그를 따라 살지 못하는 내 몹쓸 습관. 이아무개가 시몬의 입을 빌려 에두르듯 뱉어내는 참회는 그 누구보다 나의 몫이어야 한다. 약한 자 편에서 사랑으로 세상을 덮어버린 그 예수의 ‘쿨함’에 나는 그저 멋스러움을 느꼈을지 모른다. 다년간 교회를 통해 알던 박제화된 예수가 아닌 꼿꼿이 살아있는 그 예수를 발견하며 나는 단지 그 정의로움에 반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예수처럼’을 입버릇처럼 말하면서 마치 내가 정의로운 양 행세했을 지도 모른다. 정작 내가 닮아가야할 예수는 내 심연의 감옥에 꽁꽁 가두어둔 채.
이아무개는 이런 일화를 전한다. 그가 시국의 여파에 밀려 독방 감옥에 갇히던 날 이야기다. 감옥 문이 열리고 발을 들여 놓는데 누군가 말을 걸더란다. “이제 오니?” 분명 독방인데 누군가 했더니 담요 뭉치였다고 한다. 그런데 잠시 후 또 목소리가 들려온다. “많이 기다렸단다, 이아무개야” 짐작하다시피 이아무개가 전하는 그 누군가는 예수였다. 물론 이것은 이아무개가 다소 상징적 의미로 자신의 체험을 전하고 있는 것일 테다. 하지만 그의 일화는 오늘 나의 수치스러움과 정확히 공명한다. 내 심연의 감옥에 정의의 예수, 약한 자의 예수, 해방자 예수를 가두어 둔 채, 더러운 입만 나불대는 내 위악한 습관. 그 악취나는 질서. 나는 그 습관의 감옥에서 예수를 구출할 수 있을까. 그리하여 내가 오히려 그 안에 갇힐 자신이 있는 걸까. 하기야 입만 떠들고 근육은 꼼짝하지 않는 내 못된 습관이 어디 예수 정신뿐이랴: 나는 불편하다